정국은 원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중국어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어떻게 여지껏 지내왔나 보면 그건 첫째로 정국이 잘생겼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어느정도 눈치가 있는 덕분이다. 집은 호의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부자 여자가 마련해주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돈은 어쩌다가 생긴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아도 죽을지경은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서 정국은 하루가 무료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예전엔 이만큼 무기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러다간 배 굶어죽기전에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던 정국은 일을 구하기로 했다. 살고 있는 집의 근처에는 세탁소가 있다. 그래봤자 지키는 사람 없이 거대한 세탁기가 어지러울만큼 놓여져있고 작동도 빨래를 하러 온 손님들이 코인을 넣으면 알아서 돌아간다. ..
다섯번 째 만나는 날에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이 조금 연하다면 몇번 더 만나보면 될텐데요 진해질 때까지 사실 우리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니예요 마주쳤을 때 인사 받아주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는 정도긴 하지만" 우리는 까탈스러운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이 까탈스러운 것인지 날씨가 그랬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분명 그 날은 좀 고된 날이었다. 언덕길이었고 햇볕은 살이 따가울 만큼 강렬했다. 왜 하필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을 가자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여튼 가면 좋겠지라는 생각에 넣은 코스였고 그 순간엔 계절을 따지지 못한 제 머리를 각자 쥐어박는 중이었다.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었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서로 좋다고 정했던 것이니까. ..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3을 가리키는 바늘에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긴 바늘이 6을 가리킬 때 벨이 울었다. 전화를 받아든 윤기의 귓가에 지민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와도 돼. 윤기는 알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키를 챙겨 집을 나왔다.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빈 오피스텔의 복도에 울렸다. 지민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윤기는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높은 발판을 준비해올까 고민했다. 그는 지민의 재능을 알았다. 충분히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여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속이 탔다. 대본이란 대본은 잔뜩 끌어다모아 가져다주고 의기소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