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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tch /Case 2

슈홉

Kyefii 2016. 11. 16. 16:43

 나는 내가 지독하게 나빴으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나쁜 짓이라곤 전화를 받지 않고 메세지를 씹는 것 따위였다. 이게 착해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지만 이건 착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였다. 겁이 많아서 할 수 없던 것들은 많았다 싸울 때 백번 내가 사과를 해야할 순간에 되려 뻔뻔하게 굴기 라던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기…
 그러면 이것은 대체 뭐에 대한 겁이었을까. 그는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것도 아니고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뒤에 무시무시한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먹었던 겁은 지금 이 관계가 깨지면 어떡하지 에서 출발하는 현상유지실패에 대한 것이었다. 좋건 싫건 나는 이 상태가 그렇게 크게 불만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했다. 치명적인 약점이고 모든 패배의 요인이다. 내가 훨씬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굴고 심기를 건드려서 미움을 받느니 차라리 모든걸 감수하고 넘어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엊그제 기어코 못참고 헤어지자며 엿을 날리고 왔지만 속은 불편했다. 고생했던 주제에 이제야 일을 해결하고도 시무룩하게 다니던게 마음에 걸렸는지 형은 나를 불러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나를 위로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냥 본인이 술을 마시려고 부른 것 같았지만 여튼 형 앞에서 본의아니게 신세한탄을 했다. 그간의 연애사를 지켜본 사람이었으니 중간중간엔 같이 욕을 해주기도 하고 나를 욕하기도 했다.

"그니까 그새끼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매달렸냐고"
"잘생겼잖아요"
"생각보다 답이 쉽다?"
"그래도 괜찮은 애였어요"

 헤어진 와중에도 편이 들고 싶냐 너는. 편드는거 아닌데. 그렇게 짜증났던 점을 한탄하다가도 무의식중에 좋은 기억이 튀어나오는 내가 신기하긴 했다. 그래도 저것은 사실이었다. 얼굴도 봐줄만 했고 이기적으로 굴 때 빼면 잘해주고 좋다고 말도 잘 하고 ... 그러다 문득 이런게 추억보정인가 싶었을 때 정신이 확 들었다. 뭐 좋다고 애써 미화를 해주고 있는걸까, 나는 이쯤 되면 앞서 생각했던 것 처럼 겁이 많은 것도 많은 것이지만 정말로 착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생각의 알고리즘이 좋은사람-좋았던 사람일 수도 있다-으로 귀결되는 것이 내재된 프로그램이 선함 그 자체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 없다.
 별 생각을 다한다 싶어 비식비식 웃음이 나는걸 형이 그 기본적으로 잘 짓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며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그걸 가만히 보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답지않게 놀란듯 잠깐 눈이 커진다. 그래도 내 앞에서는 꽤 표현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놀라는 표정은 처음이어서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싶어 눈을 피하지 않다가 허벅지로 느껴지는 차가움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잔에서 넘친 술이 테이블위로 그리고 그 아래로 흘러 바지를 적신 것이다. 급하게 휴지를 뽑아 허벅지를 닦는다. 형은 아까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같이 티슈를 뽑아 나에게 건넸다. 허둥지둥 옷을 닦아내는데 형이 물었다.

"그.. 그럼 나는 별로냐?"

 저 말이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었는지 나는 모르겠으나 대충 형의 모습 중에서 별로인 구석은 못봤던 것 같아 성의없이 대답했다.

"아뇨 괜찮죠"
"진짜?"
"뭐가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답해버리는 바람에 재차 물어오는 대답엔 정확한 답을 줄 수 없어 결국 순순히 뭐냐고 되물어야 했다. 형은 그런 내 대답을 듣고 잠깐 빤히 나를 쳐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는 듯 하더니 조용히 테이블 구석의 벨을 눌렀다. 소란스러운 가게 안에 더 요란하게 벨이 울리고 알바생이 옆에 섰다. 형은 소주 한병만 더 가져다 주세요, 아니 맥주도 한병 더요. 하며 추가로 술을 시키고 빈 잔을 보며 혀를 한 번 찼다. 아쉬운대로 물을 들이키는 형을 보면서 나는 그냥 눈앞의 뻥튀기나 주워 먹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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