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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tch /Case 2

뷔국

Kyefii 2016. 11. 16. 16:48

 그날도 정국은 울면서 들어왔고 태형은 그날도 제 집 바깥에 작게 만들어둔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애에게 태형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 "오늘도 까였냐?" 물으니 정국은 한껏 입을 다물고 올라오던 표정을 귀신같이 서늘하게 바꾸곤

"형이 뭘알아"

 대꾸한 후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집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태형은 쫄쫄대며 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잠깐 멍하게 서있다 발등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때문에 흥건해진 슬리퍼를 내려다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슬리퍼를 끌며 자신도 집으로 들어가려다 잠깐 멈춰서 정국이 사라진 집의 대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태형은 활동적인걸 좋아하게 생겼고 역시나 싫어하진 않았지만 정적인 것들도 그만큼이나 좋아했다. 가장 의외인 점은 아마 화분을 가꾸는 일일 것이다. 물론 분갈이나 몇가닥 난 잡초를 뽑는 것은 성가신 편이지만 그냥 잠깐 아무생각 없이 멀거니 위로 쭉 자라난 식물을 바라보는건 즐거웠다. 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화단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에 정국과 눈이 마주쳤을 때 정국은 그런 취미도 있느냐고 놀렸지만 태형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어 니 닮은 호박 하나 기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그 말에 생글거리던 얼굴이 굳어서는 휙하고 골목의 계단을 내려갔던 것 같다.

 태형의 눈에 정국은 그냥 떽떽거리는 여자애 같았다. 유난히 제 앞에서 새침하게 구는 모습이나 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고운 얼굴이 한몫을 했다. 여느때처럼 화단에 물을 주고있는 제 옆에 쪼그려 앉아서는 뭐 이런거나 하고있냐는 둥 재미없다는 둥 조잘대고 있는 정국을 보고있자면 제 사촌동생이 떠올랐다. 그래서 언젠가 정국에게 이 얘기를 해주니 반응이 우스웠다.

"너 완전 내 사촌동생같다"
"왜요?"
"걔 열살인데 말 완전많아"
"..."
"양갈래하고 내가 물주고있으면 쫓아와서는 맨날 토마토 언제자라냐고 물어보는데 딱 걔같다"

 태형의 말에 사촌동생이 열살짜리 여자애라는 것을 안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있는 태형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힘은 또 좋아서 아픔에 쩔쩔매는 태형을 내버려두고 정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다음날엔 정국이 태형과 마주쳤을 땐 복수하듯 말했다. 형은 화단가꾸다가 애늙은이가 됐나보네. 나름대로 생각해온 말이었는지 다짜고짜 저가 하고싶은 말만 하고 돌아가는 정국의 뒷모습이 뿌듯해보여서 태형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했다.


 태형과 정국이 아는 사이가 된 건 꽤 오래된 일로, 태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중 맞은편 집에 정국의 가족이 이사를 왔다. 그닥 잘사는 동네는 아니였으므로 두 집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태형은 정국이 이사를 온지 한달 정도 지나고 나서야 정국이 어머니와 동생 두명과 함께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침에 교복을 입은 채 마주쳤을 때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을 알았고 정국이 2층에서 복도로 빠지는 것을 보고 그가 고등학교 1학년임을 알았다. 태형은 3학년이었다.
 얼굴을 트고 인사를 몇번하다가 지금에와서는 야, 너 하고 반말도 가끔 섞어쓰는 사이가 됐다. 물론 그런 일은 드물었지만 친해지는 것은 금세였다. 서로의 대문도 인사없이 드나들 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 때 정국은 태형에게 종종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언덕 아래에 있는 얼굴 튼 슈퍼에서 캔맥주를 사서는 성의없이 세워둔 운동기구 중 아무거나에 걸터앉아 했던 얘기들의 대부분은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태형에게 하는 얘기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짝사랑이기때문이다.
 웃긴 것은 그 대상이 할 때마다 바뀌었다는 것이다. 네번째 바뀐 짝사랑에 대한 고민을 듣던 날 태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정국에게 묻고싶던 말을 했다. 너 근데 나한테 하는 사람 매번 바뀌지? 이번엔 다른 사람이지?

"당연하죠 사람이 어떻게 한사람만 계속 좋아해요"
"근데 간격이 너무 양심없잖아 아직 일주일도 안됐어"
"걔가 정떨어지는 짓을 하는걸 봤는데 어떡해요 그럼"

 가차없네. 태형은 빈 맥주캔을 구겨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운동기구에 앉아 운동법을 따라했다. 정국은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어느정도 탄산이 빠진 맥주를 들이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태형의 아버지가 몇일 멀리 일을 나갔던 날이었다. 일주일은 혼자 집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태형은 그동안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있기만 했다. 그나마 성실하게 하던 화단 쳐다보기도 하지 않은 채 티비를 켜두고 다른 짓을 하거나 잠을 잤다. 그렇게 2,3일 정도를 보내던 중 하루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잔뜩 뻗친 머리를 애써 구기며 창문을 열었을 땐 정국의 얼굴이 있었다. 무슨일 있어? 정국이 먼저 찾아오는 일은 특별히 고백이 까였거나 괜히 말할 사람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드물었던지라 태형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으니 정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은 없는데 요즘엔 화단을 안내다보길래"
"귀찮아서"
"얘네 다 말라 죽어가요"
"내일 비오겠지"
"내일 비온대요?"
"몰라..."

 귀찮은듯 대꾸하는 태형에 정국은 또 빈정상한 얼굴을 하더니 대답도 없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정국의 행동에 가만히 닫힌 정국의 집 대문을 내다보다 창문을 닫고 다시 방바닥에 누웠다. 쟤가 왜저러지. 그러다 원래 열살 애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는데 자꾸 시무룩해진 정국의 얼굴이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양을 세도 편하지가 않다. 결국 마음이 불편해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태형은 그 길로 슈퍼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그리고 정국의 집 문을 두드렸다. 흰 티에 중학교인지 학교 체육복 같은 반바지를 걸친 정국이 밍기적거리며 나왔다. 누군가하는 얼굴로 발끝부터 사람을 올려다보던 정국이 태형의 얼굴을 확인하자 재빨리 그 평소의 새침한 얼굴을 했다. 약간의 째림이 담긴 눈빛이 따가웠다.

"뭔일 있어요?"
"아니 일은 없는데 아까가 좀 맘에 걸리길래"
"..."
"우리집 올래? 아버지 안계셔"

 태형의 말에 정국은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태형은 그것이 거절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때문에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릴뿐이었다. 잠시 후 품에 이런저런것을 가지고는 집을 나오는 정국을 확인한 태형이 제 집으로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불을 킨 다음엔 적막이 흐르는 방에서 맥주캔을 땄다. 소리는 경쾌한데 분위기는 어색해서 미칠지경이었다. 아무리 친하다해도 딱히 할말이 없는 상황에서 마주앉아보고 있는 것은 힘들고 생각보다 가만히 앉아있기 불편한 일이다. 태형은 정국이 가져온 과자를 집어먹으며 무슨 말을 해야할까 생각했다. 우선 아까의 일부터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정국아. 왜요.

"아까는 그냥 귀찮아서 그랬던거야 알지?"
"모르는데"
"알잖아"
"모른다니까요"
"아직도 화났어?"
"..."

 태형은 한번 더 물어보려다 그냥 사과를 한번 더 했다. 미안해. 그 말에 정국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면 됐어요. 그제서야 안심이 된 태형은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덥잖은 얘기를 시작했다. 급식실의 아줌마가 바뀐 얘기, 축제 때 여장을 했던 제 친구에 대한 얘기, 최근에 하는 휴대폰 게임... 둘은 실없이 웃으며 지금 하는 얘기들이 재미없지만 애써 여백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잠깐 얘기가 끊긴 사이 정국은 빈 캔을 손 끝으로 툭툭 건드리다 태형에게 말했다. 형 우리 술 좀만 더 마시면 안돼요? 태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밤공기는 좀 싸늘해서 정국은 태형의 후드집업을 걸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터덜터덜 걸었다. 나란히 계단을 하나 둘 씩 걸어내려가는데 정국이 입을 열었다.

"형 내가 최근에 또 새롭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응"
"걔가 착한데 좀 답답해"
"그래?"
"어떻게 티를 내지"
"너 원래 좋아한다고 말하긴 해?"
"내가 형한테 말하지 않는다고 안하는건 아냐"

 그렇지. 중얼거린 태형이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야지 뭐. 답답한 애라며, 말해줘야 알걸. 그 말에 정국이 멈춰서는 제가 멈춘줄도 모르고 앞서 내려가는 태형을 바라보았다. 한 열걸음 쯤 걸었을 때 그제야 제 옆에서 떨어진 정국의 그림자를 알아챈 태형이 뒤돌았다. 저보다 위에 서있는 정국을 올려다보는 것은 꽤 기분이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생각인가 싶어 얼굴을 살폈지만 가로등에 역광이 져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맥주나 좀 더 사러가자며 나온 외출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태형이 예상한 것보다 진지하게 흘러간다.
 정국은 태형과 눈이 마주친 채 그렇게 오분은 서있다가 뭐하냐고 묻는 태형의 말에 그제서야 계단을 서너개씩 뛰어내려오고 빠른 걸음으로 태형의 앞에 섰다. 아까 알아보기 힘들었던 표정이 제 앞에 놓여졌다. 뭔가 결심한듯한 얼굴은 꼬마 여자애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라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좋아해"
"응?"
"말해줘야 안다며"

 덩그러니 마주보고 좋아한다며 툭 말을 던진 정국이 이번엔 계단을 한개씩, 대신 빠르게 밟아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태형은 지나가듯 아무렇지도않게 중요한 말을 던져놓고 도망치듯 뛰어가는 정국의 뒷모습을 보다가 따라 뛰었다.
 정국의 다섯번째 짝사랑은 태형이었고 방금 짝사랑을 고백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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