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Switch /Case 1

짐슈

Kyefii 2016. 11. 23. 16:10

 윤기는 울리는 휴대폰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말았다. 맞은편의 남준이 물었다. 전화오는거 아니에요? 어 아냐. 대답했지만 계속 신경에 쓰이는지 테이블에서 떨다못해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쳐다보는 남준의 시선에 못이겨 결국 집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조용한 공간이다 싶은 곳에 다다르니 진동은 끊겨있었다. 부재중 통화 3통 이라는 텍스트가 화면에 떴다. 이걸 다시 걸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휴대폰이 짧게 울린다. 메세지였다. 윤기는 확인할까 망설였다. 요즘 세상은 너무 많은걸 드러나게 한다. 답장하고싶지 않은데 내용은 궁금해서 보고싶었다. 하지만 읽었을 때 사라질 숫자가 신경쓰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눈 딱 감고 메세지를 터치했다. 노랗게 뜨는 화면에 둥실 메세지가 떠올랐다.

[점심은 먹었어요?]
[같이먹자는거 아니니까 한번만 받아줘요]
[안받아도 되니까 꼭 먹고 일해요]

 내용을 확인함과 동시에 창을 닫아버렸다. 누가 누굴 걱정해. 괜히 중얼거리고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쑤셔넣었다. 다시 비상구 문을 잡아 열으려는데 진동 소리가 귀에 울렸다. 이번엔 생각치도 못하고 습관적으로 메세지를 열어보고 말았다. 발신인은 역시나 지민이었다.

[밥 진짜로 꼭 먹어야해요]

 화면을 쳐다보던 윤기가 메세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너나 먹으세요.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뭔가를 수용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밀려들어오는 무언가를 담을 공간적 여유가 부족하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새롭게 마주하는 감정들을 순진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변한 제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에게 경계심 가득하게 굴었는가 생각해보는데 그 시작이 너무 아득해서 되짚어보기를 포기하는게 더 편할 지경이다.
 영원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윤기의 연애는 모조리 짧았다. 관계라는게 혼자만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니니 어찌보면 스스로에게도 분명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모두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연달아 사람과 헤어지면서 윤기는 크게 상처입었다. 지금에 와 떠올리자면 쪽팔린 기억이지만 오죽하면 남준을 잡고 이렇게 한탄하기까지 했다. 야, 내 인상이 그렇게 더렵냐, 라고. 웃긴건 그때 남준이 한 대답이었다. 네. 조금?

 이렇게 힘들어 하던 순간에 만난게 지민이었다. 아예 처음보는 사이는 아니었다. 지민은 같은 과 후배로 학기가 겹쳤을 때 몇번 인사를 교환하고 프로젝트도 같이 진행했던 딱 선후배 사이, 따로 만나 밥을 먹은 적도 없었고 깊게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이런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데면데면한 중에 윤기는 먼저 졸업했고 지민은 졸업해서 축하한다는 등의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지만 둘은 그렇게까지 할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정도로만 인연이 끝나는줄 알았다. 하지만 그 얼굴을 바에서 다시 만날줄 누가 알았겠는가.
 마음의 상처를 잔뜩 안고 살면서 가장 큰 일탈을 하겠노라 결심한 윤기가 찾아간 곳은 바였다.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 찾아간 곳엔 취향인 사람이 드문드문 섞여있었지만 그것도 많이 봐준거였다. 기둥에 기대 음료를 홀짝이며 테이블과 바를 쭉 둘러보는 동안 이상하게 흥미가 뚝 떨어졌다. 갑자기 모든게 재미없고 피곤했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싶어 남은 술을 비우고 나가려는데 입구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윤기를 멈춰 세웠다. 지민이었다.
 지민과 마주쳤을 때 사실 윤기는 누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대학교시절이 흐릿해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시간이 흘렀고 무엇보다 지민은 윤기의 인생이 큰 사건이 아니었기때문이다. 반갑다는 얼굴로 인사해오는 지민에 윤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내밀어오는 손에 뒤늦게 손을 뻗어 악수했다.

“형 저 기억 안나세요?”
“어… 미안, 누구였지?”
“저 지민이요, 형 같은 과 후배였는데”
“아…”

 머릿속에서 이미 창고행이 된 대학시절의 기억을 빠르게 뒤져봤지만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 윤기는 난감함에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런 윤기의 눈빛을 읽었는지 지민은 빠르게 안부로 넘어갔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 뭐. 지민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말투가 매끈한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대화 사이에 마가 뜨지 않는다. 그렇게 가게의 입구에서 삼십분이 넘게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엔 번호를 주고받았다. 정신차리고 나니 윤기의 휴대폰에 지민의 전화번호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제 휴대폰으로 날아오는 지민의 메세지에 그제서야 번호를 교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속도는 매우 빨랐다. 어쩌다 다시 만난 인연이 이렇게 훅 치고들어올줄 몰랐다. 그것이 애정인건 더더욱 생각치도 못했다. 처음엔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 밥 한번 먹자고 하다가 그 다음엔 어디서 사냐고 묻더니 자신도 이 근방에 새롭게 방을 얻었다며 이웃이라고 혼자 좋아하는걸 지켜봐야했다. 부를 때마다 싫다고 쳐내도 되었는데 거절하지 못하고 수고스럽게 매번 지민을 만나러 나가는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이 외로워서 그런것일까 싶어 측은해지기도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간에 말도 없이 데이트 비스무레한 것들을 하면서 윤기는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 애매하게 서로의 일상에 들어오고 지나치게 의미없는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이 불편하진 않았지만 이상했다. 공과 사는 철저히,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거리도 명확한 윤기였는데 지민은 그 벽을 아주 교묘히 허물고 있었다.

 윤기는 여느 때 처럼 점심약속을 잡은 지민을 만나러 나갔다. 아무리 봐도 SNS에 연인과 가면 좋은 맛집 베스트 몇에 나올 법한 장소였다. 늘 이런 곳에 오는건 아니었으니 오늘 뭐 월급이라도 탔나 생각하며 망상을 지웠다. 맞은편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지민은 턱을 괴고 윤기의 말에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게 잘못은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생각이 복잡하던 때였기에 결국 윤기는 지민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 창피했고 물어봐야 속이 시원해질 자신도 싫었다. 하지만 이미 입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야 우리 뭐… 그런거냐?”
“뭐가요?”
“이렇게 맨날 만나는거 좀 그렇지 않냐?”
“왜요? 친구 사이에도 이러지 않아요?”

 아니 나는 안그래… 윤기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하는 지민에 대답을 속으로 삼켰다. 말하는걸 보니 여지껏 했던 고민들이 무색하게 저만 오만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민망해졌다. 제 앞에 서버가 내오는 음식들에 기력없이 포크를 찍으며 잠시나마 설렘에 불이 붙었던 자신을 책망했다. 생각보다 지민의 대답은 데미지가 컸다.

 그날 뒤로 윤기는 지민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제야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았다. 남은 생각도 안하는데 혼자서 외로움에 절어 호의에 제멋대로 캡션을 달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윤기는 최대한 일을 끌어모아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었다. 닥치는대로 제안이란 제안은 다 승낙하는 자신을 지켜보며 남준은 형 제정신이에요? 하며 물어왔지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였기에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먼저 걸려오는 전화도 거절하고 문자도 피했다. 어쩌다 읽으면 건성으로 답장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윤기가 노골적으로 지민을 무시하자 인내심있게 꼬박꼬박 오던 문자도 서서히 멎었다. 한 한달 쯤 지나 윤기는 지민을 알기 이전처럼 지내고 있었다. 예전처럼 남준과 배달해온 음식을 씹으며 휴대폰으로 자료를 체크하고 밤에는 스튜디오를 정리했다. 이제는 업무메세지밖에 오지 않는 휴대폰을 편안하게 확인하면서 간간히 제 끼니를 챙겨묻던 지민의 메세지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더 일에 매달렸다. 설레발 친 죄가 이렇게도 컸다.

 반성의 의미로 몰아치는 마감을 끝낸 윤기가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한동안 스튜디오의 구석에서 먹고자느라 챙겨나왔던 몇개 안되는 세면도구를 가방에 쑤셔넣고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집에가야지 결심했지만 또 졸아버리는 탓에 꼬박 반나절을 자고 나온뒤 마주한 하늘은 이미 새까맣게 저물어있었다. 작업실의 근방에 사는 남준이 매일 날씨를 알려주긴 했지만 매번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탓에 삼일 전 입고나온 얇은 자켓 사이로 바람이 숭숭 파고들었다. 아씨, 옷 하나 들고나오라고 시킬걸.
 계단을 하나씩 밟아갈 때마다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최대한 돈을 아껴보겠답시고 구한 방은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거기다 4층이었으니, 윤기는 쌕쌕대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체력이 쓰레기된 것에 탄식하며 제 집에 도달했을 때 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촌스러운 아이보리색의 현관문이 아니라 마냥 낯설진 않은 인영이었다. 마지막 계단을 밟음과 동시에 들어온 노란색 등불이 지민의 얼굴을 비췄다.

“형”
“너…”
“저 추워요”
“…….”

 윤기가 말을 이을 새도 없이 지민이 양 팔로 몸을 감싼 채 장난스럽게 이를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집에 들이고싶지 않았지만 일단 날씨도 날씨였고 자신도 추웠기에 윤기는 말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등 뒤로 지민의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윤기가 커피를 지민에게 내밀었다. 받아들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지민에 윤기는 심란해졌다. 후- 커피를 식히는 지민을 내려다보며 이걸 어쩌나, 일단 왜 찾아왔냐고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먼저 말을 거는 순간 첫 만남 때 처럼 윤기는 지민의 대화에 말릴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좀 매정하지만 보내야겠다 싶어 입을 열으려는 순간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마주친 눈에 윤기가 주춤 했다.

“저 왜 왔는지 안물어보세요?”
“……”
“전화로 찾아간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왔어요, 그냥”
“야, 내가 설마…”
“사실 일주일 전부터 계속 왔었거든요? 근데 시간이 안맞는지 한번도 안마주치더라고요. 형이랑.”
“뭐?”

 지민이 쏟아내는 말에 윤기는 쥐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일주일 전부터 집 근처를 서성였다니 뭐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무식한 방법이 다 있나. 아무리 연락을 좀 피했기로서니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하면 시간을 냈을 텐데 윤기는 선뜻 연락도 못한 지민에게 미안해졌다. 뒷 말이 궁금해 윤기는 지민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지민이 윤기의 행동을 지켜보다 편하게 자리잡은 것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일단 무턱대고 찾아온건 죄송해요. 빈 집에 찾아온 것도요, 좀 스토커같나. 근데 진짜 꼭 하고싶은 말이 있었어요.

“뭔데?”
“우리 사귀어요”

 지민의 말에 윤기는 마시던 커피를 뱉을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뭐? 콜록거리는 와중에도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사귀어요. 저 형 좋아해요. 눈앞의 휴지로 대충 입가를 닦은 후 윤기가 지민을 쳐다보았다.
 단호한 눈빛, 말이나 행동이나 모두 저 눈빛으로 제 벽에 흠집을 내고 손을 내밀어 저를 그 속에서 끄집어냈던 지민이었다. 생각해보니 지민은 교묘한 것이 아니었다. 대놓고 폭탄을 들고와 제 앞에서 터뜨리고 불도저로 밀고들어왔다. 그걸 바보같이 눈치 못챘던건 자신이었다. 윤기가 마른 세수를 했다. 나는 저게 쟤 디폴트인줄 알았지.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로 지민이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쩌면 좋나.

“형은 저 싫어요?”
“아니 싫진 않은데…”
“연락은 왜 피했었어요?”
“……”
“저 싫어하는거 맞잖아요”
“니가 이런건 친구사이에도 한다며!”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지민에 윤기가 할 말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해서 계속 들어주고있자니 갑자기 억울해지는 것이었다. 윤기라고 지민이 왜 싫었겠나, 먼저 연락하고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는게 귀엽기도 했고 간만에 챙김받는 기분이라 좋았었다. 그러나 이런 제 기분을 순식간에 김칫국으로 만들어버린건 지민이었다. 그놈의 친구 얘기만 하지 않았어도 윤기가 연락을 끊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윤기의 큰 소리에 지민이 잡고있던 머그를 더 세게 움켜쥐고 소파 뒤로 몸을 물렸다. 아 깜짝이야.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인다.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지민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건 형이 저한테 호감있는줄 몰랐어서 한 소리였죠. 먼저 맨날 만나는거 좀 그렇지 않냐면서요.

“넌 그게 어떻게 싫다는 소리로 들리냐?”
“아니었어요?”
“난 자꾸…”

 데이트같아서 기분 이상했다고…. 윤기가 어느새 저에게 돌아온 지민의 눈을 피해 잔을 집어들었다. 웃풍이 심한 탓에 커피는 금세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속이 답답해 그대로 다 마셔버리고는 잔을 내려놓은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이 윤기를 올려다봤다. 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이 대답했다. 네 형.

“그래서 넌 내가 좋다는거야 뭐야”

 말하는 윤기의 귀 끝이 붉게 달아있었다. 찬찬히 윤기의 얼굴을 살피던 지민이 대답했다. 좋아요. 많이 좋아요.

“그래?”
“네”

 나도 너 안싫어. 윤기가 툭 던지듯 말하곤 지민의 손에서 컵을 뺏어들었다. 내일 바빠? 그리고 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말에 지민이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별일 없어요. 그럼 자고가. 비척비척 주방으로 가는 윤기의 뒷모습에 대고 지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Switch > Case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짐진  (0) 2017.02.26
짐슈  (0) 2017.01.06
짐슈  (0) 2016.11.20
짐슈  (0) 2016.11.16
shot  (0) 2016.10.09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