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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지정

Kyefii 2016. 12. 5. 00:52

 정국은 지민과 나란히 섰다. 버스의 기둥을 잡고 익숙하게 하차벨을 누른다. 손에 가득 물건을 들고있느라 손잡이를 잡지못하고 발로만 버티던 정국이 버스의 급정거에 휘청였다. 지민이 넘어지려는 것을 겨우 잡았다. 멋쩍게 정국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안이러는데. 지민에게 잡힌 허리에 정국의 시선이 꽂혔다. 제 옆구리에 붙어있는 손을 빤히 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정면을 본다.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버스가 멈추고 지민이 먼저 내렸다. 정국은 지민의 뒤를 따라 내렸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번은 같이 걷는 길이다. 24시간 불이 켜져있는 밥집을 지나 편의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가로등이 오십걸음 간격으로 세워져있는, 그런 길. 아직도 등불의 색은 주황빛이고 아파트가 없는 동네라 빌라의 작은 창으로 희미하게 티비소리와 형광등의 퍼런 불빛이 번져나왔다.

 지민이 살고있는 자취방 앞까지 걸어가서는 고개를 꾸벅였다. 들어가세요 형. 정국이 까딱이니 지민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정국은 지민이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가 없어 귀찮지만 올라가야 하는 계단을 밟는 모습을 본다. 센서등이 지민의 인기척에 밝아지고 한 서너개의 등이 켜졌을 때 정국은 발을 옮겼다. 

 아까 들어갔던 길에서 나와 다시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 길로 나온 정국은 방금까지 온 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쭉 뻗은 길의 옆엔 심어놓은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치워져있었다. 치워진 사이에 또 새롭게 떨어진 마른 잎들이 정국의 발 끝에 채였다. 밟히면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지민은 정국이 자신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산다고 알고있다. 하지만 그건 정국이 새 학기가 되고 지민에게 빠진 이후부터 이어진 거짓말이다. 정국은 지민과 같이 내린 정류장에서 적어도 정류장 세개는 반대로 걸어가야하는 곳에서 살고있다. 수고스럽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정국의 성격이다. 따로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낼만한 궁리도 영 생각나지 않고 그럴만큼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딱 이대로가 좋았다.

 품에 짐을 끌어안고 걸어가면서 정국은 정말 가끔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는 막차 버스들은 불을 끈 채 빠르게 달렸다. 한가로운 도로엔 택시들이 멈춰있었다. 정국은 계속 걸었다. 셔터를 내린 가게들을 지나 겨우 자신의 집이 있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 그제야 짐을 내려놓고 양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짐을 들고 집에 들어갔다. 


 지친 몸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씻고 나와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툭툭 두드린다. 미처 수건에 스며들지 않은 물방울들이 정국의 머리끝에 맺혀서 뺨으로 떨어졌다. 책상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신경쓰여 정국은 그것을 집어들었다. 혹시나 메세지가 와있지는 않을까 카톡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정국은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고 드라이기를 집었다.

 요란스럽지만 단조로운 소리를 내며 머리를 말리다 자칫하면 모르고 넘어갔을 진동을 알아챈 정국이 드라이기를 끄고 옆에 내려두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민이었다. 잘 들어갔냐는 메세지에 정국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다. 어차피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네' 이 한글자만 띡하니 보낼 자신을 알지만 괜히 망설여지는 것이다. 오늘은 조금 길게 써볼까, 귓등을 긁적이며 화면을 내려다본다. 액정 위로 물기가 떨어졌다. 

 '네' 라고 치고 싶은데 자꾸만 오타가 났다. 엉망으로 쳐지는 단어들을 지우려다 실수로 전송버튼을 눌러버려서 정국은 살면서 처음으로 지민에게 읽을수도 없는 말을 보내버렸다. 


[ㄴㅣㅐㅔ]


 이미 1까지 옆에 띄운 메세지가 부끄러워 정국은 귀가 달아올랐지만 눈은 계속 화면에 고정했다. 형이 뭐라고 할까. 한 삼십초쯤 쳐다보는데 숫자가 사라졌다. 답장이 왔다.


[ㅋㅋㅋ그래 내일 보자]


 지민의 답장을 확인한 정국이 바람빠지듯 옆으로 넘어졌다. 동그란 원형의 등과 벽지가 눈에 가득 들어찼다. 소설처럼 지민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가만히 눈이 시릴 때까지 눈도 감지 않고 멍하니 있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다시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말리는 동안 잔상이 계속 남는다.

 오타 하나에도 신경쓰이는 자신을 아는지, 귀찮고 힘들게 정류장에서 같이 내려 굳이 그 길을 돌아오는 자신을 아는지.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팔이 아파서 정국은 지민의 생각을 하다가 마구잡이로 머리를 흐트렸다. 어느새 보송하게 마른 머리칼이 손틈새로 들어왔다. 이제는 다 말랐는데, 정국의 앞으로 방울들이 떨어졌다. 머리카락의 끝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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