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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efii 2017. 1. 2. 11:39

 아마 휴게소에서였을 것이다. 조금 먼 곳에서 새벽부터 불려가 촬영 보조를 했다. 아는 사이면 더 굴려먹는다는게 한톨도 틀린 말이 아니라 자고 일어났을 땐 온몸의 근육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좀 나았다. 장소가 지방이었던 터라 운전을 하러 내려갈 때에도 형과 교대를 했고 올라오는 길에도 똑같이 했다.
 둘 다 각자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올라오다가 중간에 방을 잡아 자고 올라올 수 있을만큼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중간에 차를 대놓고 쪽잠을 자고 일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가 계속 해도 된다고 했지만 형은 굳이 교대를 하자고 했다. 그 제안에 형의 미숙한 운전실력에 대한 불안함이 깔려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피곤함이 이겼다. 졸다가 죽으나 불안해하다 죽으나 그게 그거일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운전해서 서울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결국 참다 참다 배고파서 눈에 들어오는 휴게소에 들리기로 했다. 휴게소로 들어서는 차에 형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데요. 그럼 먹어야겠네.
 뭘 시킬까 고민하다 별로 올 일도 없고 세련된 곳도 아니라 흔한 우동을 시켰다. 내가 주문하는 것을 본 형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휴게소에선 역시 우동이지. 주문을 마치고 옆으로 살짝 비껴서 형이 주문하는 것을 본다. 뭘 시키나 가만히 지켜보는데 나한테는 그렇게 말했으면서 자기는 시킨다는게 돈까스다.

"휴게소는 우동이라면서요"
"너 먹으라고"
"그럼 치즈돈까스 시키지"

 둘 다 피곤해서 아무 얘기나 하며 빈 자리에 앉았다. 티비에서는 아침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었다. 상쾌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휑한 홀에 울린다. 나는 옷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테이블만 쳐다보다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김이 나는 주방 가지런히 정렬된 편의점의 음료들, 모든 것이 조용했다. 소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정작 귓속은 적막이라 졸음이 오려는 순간 벨이 울린다. 손에 쥐고있던 구겨진 영수증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아 내가 널 좀 많이 좋아해"

 나는 입으로 가져가던 젓가락을 멈췄다.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그대로 입에 넣어야하나 지금 입은 이미 열려있어서 눈만 굴리면 얼굴이 웃길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다 결국 도로 면을 국물속으로 보내주고 고개를 든다. 형은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은 건들지도 않고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졸음이 잔뜩 묻은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게 웃겨서 그리고 항상 하던 말이니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만 전혀 이 상황에서, 이런 공간에서 할 얘기는 아니기에 반응하였을 뿐이었다.

"맨날 하는 소리잖아요 그거"
"니가 생각 하는 것보다 더 좋아해 아마"
"내가 얼마나 생각하는 줄 알구요"

 내 대답에 퉁퉁 부은 눈꺼풀이 조금 올라간다. 나는 그제야 아차 말실수 했구나 싶다. 얼마나 생각하는데? 능청스럽게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이 대화를 끝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답이 안난다. 형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재수없게도 입가에 미소까지 올린 상태로 내 대답을 기다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소에 하던 것 처럼 대답 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말대답을 하는 바람에, 그것도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에는 누구한테 뒤쳐지지 않는 형 앞에서 저렇게 말을 해버려서 무슨 말이든 해야했다. 굼뜬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 마주보는 눈이라도 피하자 싶어 다른 곳을 쳐다본다.

"근데 이 얘기를 이런데서 해요?"
"뭐가?"
"좋아한다는 얘기요. 맨날 듣는거라 놀랍진 않은데 이런데서 들으니까 새롭네"

 생강의 효능과 제철음식에 대한 정보가 대화 사이의 여백을 채운다. 뒤이어 단체관광인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휴게소에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둘밖에 없던 공간에 익숙한 소음이 채워지고 다시 형을 바라본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형의 눈은 내 시선이 움직인 자리를 마찬가지로 훑고 재빠르게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이정도면 잘 빠져나간거겠지. 나는 다시 우동을 집는다. 국물까지 마시는 동안 형은 답이 없다. 그릇을 집어들어 다 비우고 내려놓았을 때 형의 입이 느린 속도로 벌어진다.

"아니. 아까 눈을 딱 떴는데 말하고 싶더라고"
"..."
"그래서 말한 것뿐이야"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다시 대화 속에 나를 잡아다 끌어앉힌다. 할 말을 잃은 내 앞으로 형은 자신의 돈까스를 밀어주며 여전히 혼자만 편하게 말을 했다. 이것도 먹어. 나는 정확하게 날아온 카운터에 멍해진 채 조각난 돈까스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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