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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tch /Case 1

짐슈

Kyefii 2017. 1. 6. 01:27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3을 가리키는 바늘에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긴 바늘이 6을 가리킬 때 벨이 울었다. 전화를 받아든 윤기의 귓가에 지민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와도 돼. 윤기는 알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키를 챙겨 집을 나왔다.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빈 오피스텔의 복도에 울렸다.


 지민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윤기는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높은 발판을 준비해올까 고민했다. 그는 지민의 재능을 알았다. 충분히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여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속이 탔다. 대본이란 대본은 잔뜩 끌어다모아 가져다주고 의기소침한 애를 달래 오디션장에 보내기를 수십번이었지만 항상 애매하게 순위권에서 밀렸다. 도대체 뭐가 부족했기에 늘 월등히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미끄러지나, 윤기는 수소문 끝에 그 답을 알아냈다. 뒷배경, 그니까 스폰서의 여부였다.
 차라리 모르는게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모른 채 그냥 평소처럼 대본이나 전해주고 관계자들에게 명함이나 돌릴걸. 하지만 이미 머릿 속에 박힌 쉬운 길은 잊혀지지 않았다. 이것만 붙으면 다 된다고 하는데, 눈 딱 감고 참아내면 더이상 쓰게 웃는 애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할 수 있다는데. 결국 윤기는 지민에게 알리지 않고 우선 스폰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땅히 얼굴을 알릴 출연작이 없었던 탓에 윤기는 제가 먼저 그들에게 접근을 해서 대충 얘기를 흘리거나 해야했다. 그러다 업계에 꽤 입김이 센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지민의 연기를 인상깊게 봤다고 했다. 그러나 윤기는 그 말에 마냥 웃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볼 수 있었던 지민에 대한 것은 끽해야 드라마에서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큰 분량 없이 짧게 출연하는 수준의 비중이었기때문이다. 그래도 연락온게 어딘가 싶어 기뻤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지민에게 어떻게 말하는가가 남아있었다.

 윤기는 돌려 말할 줄 몰랐다. 이것은 천성이라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촬영이 없는 날 밤에 지민을 불러냈다. 조용한 가게에 들어선 지민은 모자를 벗으며 의아한 얼굴로 윤기 앞에 앉았다. 어차피 저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자조적인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지민이 먼저 말을 걸었지만 윤기는 대답 하지 않고 앉으라는 손짓만 했다. 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어낸 지민이 숨을 고른 것을 확인한 윤기가 다른 말 없이 본론을 던졌다. 불러낸 이유를 들은 지민이 헛웃음을 짓다 머리를 쓸어올리기를 반복했다. 정말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지민이 윤기의 말에 대답했다.

"저 그렇게까지 하고싶진 않아요"
"내가 지쳐서 그래"

 일부러 눈을 돌리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지친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게 지겨웠다. 그러나 진심을 뺀 말은 오해하기에 좋았다. 자신의 말에 굳은 지민의 표정을 확인하고 윤기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피곤한 제스처를 하고 마음이 진정된 후에는 턱을 받친다. 다시 마주한 굳은 얼굴에 뚜렷하게 박힌 눈이 답지않게 흔들린다.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이것도 열심히 해 그럼 되겠지"
"…"

 너나 나나 너무 순진하게 살았나보다.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낸 후 지민의 앞으로 내밀은 윤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제 앞에 놓인 미색의 손바닥만한 종이를 내려다보는 지민의 정수리를 바라본다. 숫자 몇개 적힌 종이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얼어버린 듯 계속 그 자리에 멈춰있는 지민을 뒤로하고 윤기는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겨우 사고가 나지 않을만큼 빠르게 엑셀을 밟아 집에 도착해서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다.
 손에는 휴대폰을 쥔 채 지민의 연락을 기다리며 까맣게 불이 꺼진 화면을 응시하는 윤기는 지민이 이대로 다음날 아침까지 연락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냥 자신이 한 소리는 미친 소리로 넘겨버리고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욕이나 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창 밖의 하늘이 새파랗게 밝아버리고 휴대폰을 쥐고 있는 제 손의 테두리가 또렷해졌을 때 진동이 울렸다. 뜨지 않기를 바랬던 이름과 함께, 마지못해 받은 전화기 너머로는 듣고싶지 않았던 말이 넘어왔다.

[…할게요]

 앞의 세 글자만으로 충분했건만 덧붙인 지민의 말에 윤기는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말일 것이라 직감했다.

[…난 형이 힘든거 싫으니까]


 결국 자신을 목적으로 잡고 시작된 관계에 윤기는 지민이 전화에 불려가는 날이면 꼭 죽고싶었다. 애를 지옥으로 떠밀은 것 같아 자신이 역겨웠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신이 그런 선택을 했기에 지금의 네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위악을 부리고싶은 마음이 깊게 박혀있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있지만 지민의 성공을 지켜보며 이제는 무엇이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바빠서 행복하다며 웃는 것이 정말로 자신 또한 기뻐해도 되는 일인지에 대하여.
 그러나 생각보다 속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그것은 윤기의 자괴감이 커져버린지 얼마 되지않아 일어났다. 다섯번 째 여자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에 지민은 제 집 앞에 도착해 내리라고 말하는 윤기에게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섞이는 입 안 가득히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억세게 제 볼을 잡아오는 지민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어깨를 미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거부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 윤기는 그렇게 지민을 받아들였다. 처음은 키스였고 두번째에는 차에서, 그리고 세번째에 지민은 어떻게 간신히 멀쩡한 정신으로 윤기에게 말했다.

"나 형 집에서 자고갈게요."

 술에 취해 느릿하고 어질러진 말투로 말을 뱉은 지민의 눈이 윤기를 쳐다봤을 때 결국 또 거절하지 못하고 지민을 제 집에 들였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만남이 끝나면 윤기의 집으로 가 몸을 섞는 것이 하나의 약속처럼 굳어졌다.
 지민의 밑에서 흔들리며 윤기는 많은 사람, 많은 방법들 중에 결국 자신에게 풀어내는 지민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비밀을 만들어버리고 마음편히 갈 곳 없어 자신에게 돌아온 지민에게 자신은 그저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법으로 몸을 내어주고 있다. 자신이 시작한 것이니 결국 자신으로 해결하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윤기의 속을 망쳤다.


 오늘은 술을 적게 마셨는지 꽤 걸음 걸이가 멀쩡해보이는 지민을 뒤로 윤기가 복도를 앞서 걸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윤기의 몸 구석 구석에 입술을 찍어내리던 지민이 갑자기 멈추고 윤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겨우 신발장에 기댄 윤기가 갈피를 잃은 손을 몇번 허우적거리다 지민의 등을 끌어안았다. 어깨에 고개를 묻고 지민은 천천히 숨만 내쉬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 안에서 민감해진 신경은 어깨에 닿은 지민의 눈두덩이로 전해지는 맥박마저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곤두서있었다. 그러다 지민의 물기서린 목소리가 가슴께에 닿는다. 선명한 발음이 적막을 가르고 윤기의 귀를 파고들었다.

"형은 나 좋아하죠"
"…"
"그러니까 받아주는거죠"
"…"
"…동정만 아니었음 좋겠어요"

 관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동정은 커녕 오로지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던 윤기는 대답대신 처음으로 먼저 지민에게 입을 맞췄다. 회피만 해온 감정이 다다른 곳엔 자신도 알 수 없는 수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제 얼굴을 붙잡은 손 위로 지민이 손을 겹쳤다. 혀가 얽히는 동안 찢어질 듯 한 이명이 지민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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