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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efii 2017. 1. 11. 01:14

 다섯번 째 만나는 날에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이 조금 연하다면 몇번 더 만나보면 될텐데요 진해질 때까지 사실 우리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니예요 마주쳤을 때 인사 받아주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는 정도긴 하지만"

 우리는 까탈스러운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이 까탈스러운 것인지 날씨가 그랬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분명 그 날은 좀 고된 날이었다. 언덕길이었고 햇볕은 살이 따가울 만큼 강렬했다. 왜 하필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을 가자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여튼 가면 좋겠지라는 생각에 넣은 코스였고 그 순간엔 계절을 따지지 못한 제 머리를 각자 쥐어박는 중이었다.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었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서로 좋다고 정했던 것이니까. 생각보다 얘와 나는 보는 눈이 없거나 미래를 보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했던 것 같다.

 전망대에 놓인 벤치에서 애는 저런 말을 했다. 올라가기 전 그보다 더 전에, 사실 그렇게 예전은 아니고 어젯 밤에 술에 취해서 내가 했던 얘기를 기억하고는 저런 말을 던진 것이다. 이걸 기억력이 좋다고 해야하나 뒷끝이 있다고 봐야하나. 무엇이 되었던 의외의 모습이라 마시느라 입에 대고 있던 물병을 슬며시 떼고 고개를 돌렸다. 두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고 저 멀리 그어진 바다의 끝을 내다본다. 하지만 바짝 긴장한듯한 귀 끝이 조금 뾰족해보인건 기분탓일까.

 떠올려보면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한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말을 하면 항상 애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보거나 그것을 만지작대거나, 안주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거나 하며 술김에 하는 얘기들을 흘려듣는 척을 했다. 속으로는 실제로 아니면 마음 속에라도 분명 존재할 작은 노트에 모조리 기록하고 있을 거면서.

"그걸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어?"
"저 어디가서 쉽게 잊혀지는 타입은 아니라서요"
"…"
"자존심이 좀 상하길래"

 할 말은 다 하면서 끝까지 고개는 돌리지 않는 것도 그 귀여운 자존심에서 나온 것일까 싶어 웃음이 난다. 나는 애의 이런 점이 좋았다. 기준이 궁금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이, 숨길법한건 거침없고 내지른 주제에 뒤늦게 조금 쑥스러워하는 그런 모습들. 그러면서도 끝까지 부끄러운 티는 내기 싫어서 애써 괜찮은 척 늘 하는 흘려듣는 자세로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사랑스러웠다. 많이.

 그래서 나는 그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다. 이게 오히려 애의 속을 긁어놓는다는 것을 알지만 의도한 대로 흘러가게 해주는 것이 매너일 것 같아서. 물론 원하는 대답은 이것이 아닐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애를 당황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결국 제 입으로 더 속 안에 숨겨진 사실을 실토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쓴 사람도 맘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대로 따라가주는 것이다.

"경치는 다 봤어?"

 먼저 던진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닌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눈 위에 만들어 놓은 손그늘도 넣어두고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본다. 그리고 조금 샐쭉해진 얼굴로 대답한다. 네 근데 별거 없네요.

"그냥 맨날 보는 바다네"
"그러게요"
"음…너 잠깐 여기에 서봐"

 애의 손을 잡아 벤치 옆의 가로등 옆에 세워두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멀뚱히 서있게된 애의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 더 찌푸려졌다. 뭔데요. 대답 대신 나는 뒤로 조금 물러나 풍경을 바라본다. 아까 애가 했던 것처럼, 직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태양이 피부 위로 쏘아대던 강렬함 그대로 눈으로 들어오기에 그늘을 만들었다. 작게 쪼개어 세워진 건물들과 일직선의 수평선 미니어처같은 다리들… 그 사이에 해를 등진 탓에 그림자마냥 까맣게 실루엣만 남은 채 우뚝 서있는 너. 감상하는 동안 불평이 넘어온다. 뭐하냐니까요.

"풍경 보는데"
"…"
"이제 좀 낫네"

 속으로 열을 세며 표정을 알 수 없는 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다시 다가갔다. 다시금 드러나는 얼굴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어오는 나를 눈으로 쫓는다. 옆에 나란히 서서, 이번엔 내가 그 눈을 피한 채로 말을 던졌다. 

"솔직히 여기 정말 별거 없는데 자꾸 생각날 것 같아"
"왜요?"
"너 쉽게 잊혀지는 타입 아니라며"
"…"
"그래서 너 좀 빌린거야. 오늘 잊어버리기 싫어서"

 왜 잊어버리기 싫은데요? 묻고싶은걸 억지로 참는게 보여서 이걸 먼저 말해줄까 하다 참기로 한다. 생략된 말들은 어차피 네가 원하는 말이 맞아서, 혀를 굴리고 소리를 내어 말해버리는 대신 계속 떠올리도록 잊을 수 없도록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너는 잊을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했지만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오히려 내쪽이었다.

 정국아 이미 네 속에 충분히 각인된 나를 언제쯤 눈치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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