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On

지정

Kyefii 2017. 2. 7. 13:32

 정국은 원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중국어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어떻게 여지껏 지내왔나 보면 그건 첫째로 정국이 잘생겼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어느정도 눈치가 있는 덕분이다. 집은 호의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부자 여자가 마련해주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돈은 어쩌다가 생긴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아도 죽을지경은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서 정국은 하루가 무료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예전엔 이만큼 무기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러다간 배 굶어죽기전에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던 정국은 일을 구하기로 했다. 살고 있는 집의 근처에는 세탁소가 있다. 그래봤자 지키는 사람 없이 거대한 세탁기가 어지러울만큼 놓여져있고 작동도 빨래를 하러 온 손님들이 코인을 넣으면 알아서 돌아간다. 정국은 거기에서 동전을 바꿔주거나 세제를 팔거나 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하기로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셈만 할 줄 알면 되는 일이었으니 딱이었다.


 카운터는 가게의 가운데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작게 마련되어있다. 그리고 가게에는 공간을 이등분하는 긴 의자가 놓여져있다. 정국은 사람이 없다 싶으면 카운터가 아닌 긴 의자에 앉아 세탁기가 돌아가는걸 바라보았다. 그건 어지럽고 퍽 재미있었다. 물이 통 안에서 이리저리 구르고 거품이 차오르고 하는 것들이 솔직히 무슨 재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눈앞의 풍경이 나름 요란해서 볼만은 했다.


 그날도 그렇게 시끄러운 풍경을 구경하는데 누군가가 정국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인기척을 먼저 느낀 정국이 고개를 돌리자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었는지 애매하게 손을 뻗고 있던 남자가 살짝 뒤로 물러났다. 정국은 눈만 깜빡였다. 정말 오랜만에 의식적으로 눈에 담는 사람의 모습인지라 깜빡이는 눈꺼풀의 속도를 천천히 했다. 그는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정국에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무슨 자신감인지, 정국이 늘상 해석하려고 기를 쓰던 영어도 중국어도 아닌 말이 나온다. 어느나라 말이었더라, 남자가 하는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해보는데 한국어다. 아,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였다.

"저기요"

 낯익지만 당장 저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머릿속이 엉켜버리는 바람에 정국은 속으로 말들을 고르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말을 잇는다.

"혹시 동전이 없어서 그러세요?"
 
그의 말에 정국이 입고 있던 점퍼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종종 동전을 바꾸려는 손님들에게 빠르게 쥐어주려고 넣어두었던 잔돈이 정국의 손에서 구른다. 작고 얇고 맨질한 표면이 저들끼리 부딪치며 소리를 내지만 세탁소를 가득 울리는 기계의 진동과 소음에 묻혀버렸다. 정국은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있는 사내를 다시 찬찬히 살핀다. 뜬금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포근한 갈색의 머리, 편안한 차림에 외국에 와서 낯선 사람에게 당당하게 제 나라 말을 쓰는 뻔뻔한 ... 그냥 구김이 없다고 보는게 맞을듯한 인상.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를 멀뚱히 보던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의 시선도 따라 올라온다. 정국은 그의 질문 대신 가게를 뛰쳐나왔다. 저기요!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멀어진다. 최대한 빨리 달려서 가게의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맨션의 계단을 몇개씩 밟아 올라간다. 다 녹슨 경첩이 신경을 긁는 소리를 내건 말건 문을 우악스럽게 열어 가죽이 다 벗겨진 쇼파에 널부러져있던 옷가지 몇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가게로 돌아갔다. 숨이 터질 것 같았지만 묘하게 무언가 들뜨는 기분에 늘 졸리던 정신이 깨는 느낌이다.


 가게에 돌아갔을 때 여전히 남자는 있었다. 대신 이번에는 그가 의자에 앉은 상태로, 자신의 빨래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있다. 다시 보니 정국이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세탁기에 들어있던 옷이 그의 것이었던 것 같다. 정국은 그가 여전히 가게에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대는 소리에 그가 돌아본다. 무릎을 짚고 쇠맛이 나는 침을 삼키던 정국이 겨우 헐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남자에게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그의 눈동자도 커지는 것만 같다.

"...네"
"네?"
"저, 동전이 없어요"
"..."
"빌려주실래요?"

 정국의 말에 남자가 한참 뒤에야 모르겠다는 표정을 풀고 웃어보인다. 그리고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보였다. 여기요. 빌려달라며 턱하고 내민 정국의 손바닥에 가지런히 올려두는 그의 손을 보는데 짧고, 뭉툭하고, 그런데 포개어 올려진 동전을 콕콕 찌르는 검지 손가락 끝의 힘이 꽤 세다. 일련의 과정을 가만히 보기만 하던 정국의 손에 땀이 배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대충 고개짓으로 하고 비어있는 세탁기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의 세탁기 바로 옆이다. 문을 열고 아무렇게나 들고온 옷들을 집어넣은 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그냥 동전을 투입구에 밀어넣는다. 제대로 읽을줄도 모르는 버튼을 대충 눈치껏 누르고 잠시 후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세탁기를 확인한 정국이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한숨을 쉬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유리에 비치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국은 아까 자신에게 웃어보이던 그 얼굴을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몇일 전 길바닥에서 햇빛을 피하느라 숨어들었던 그늘 사이로 기어코 비집고 들어오는 빛줄기를 떠올렸다.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정  (0) 2017.03.16
지정  (0) 2017.03.12
지정  (0) 2017.01.11
지정  (0) 2017.01.02
지정  (0) 2016.12.12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