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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tch /Case 1

짐진

Kyefii 2017. 2. 26. 01:13

지민이 내민 선물에 나는 좀 놀랐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이건 좀 무리였을텐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앞에서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굴었다. 몸 어디 뭐 하나 판거 아니야? 놀리는데 거기에 대고 지민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으면서 남은 목숨이 걱정되긴 한다고 받아쳤었다.
그러고 며칠 뒤 집에 찾아갔을 때 자주 보이던 물건들이 몇개 없어진 것 같아 물으니, 뭐라고 정확하게 대답하지는 않고 턱 끝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다 그거에 갈아 넣었어요. 그 말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뭘 팔긴 팔았구나 싶어 뭔가 찡하다가도 머리 어딘가 구석은 제멋대로 굴러갔다.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이게 주고 싶었나, 고맙긴하다만.

“생각보다 낭만적이다 너”
“내가요?”
“그냥 소설 같아서”

반지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중얼거리며 지민의 방에 놓인 매트리스에 앉아 책을 읽었다. 손 끝에서 느리게 넘어가는 페이지 소리에 집중하다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춘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뭔가 정리하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손에 쥐고 있던 옷가지를 쥔 채로 방 기둥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좁은 집에 작게 있는 방은 거의 짐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는 곳이다. 주 생활은 지금 내가 앉아있는 거실에서, 거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여튼 내가 사오고 지민이 설치한 커텐이 걸려있는 이 곳에서 한다. 지민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지점과 내가 앉아서 지민을 바라보는 사이의 거리는 아마 채 열 걸음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왜?”
“뭐가요?”
“뭘 그렇게 쳐다보냐고”
“…그냥요”

대답이 흐리멍텅해서 나는 책을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태 뭐했냐? 하며 다가가는데 지민은 대답은 커녕 등을 돌리고 창고로 들어간다. 기분이 움찔하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멈춰섰다. 지민은 방에 방금까지 손에 쥐고있던 뭔가를 내던지고는 문을 닫으며 나에게 대답했다. 밥 먹으러 갈래요? 그 말에 나는 눈만 살짝 굴리면 보이는 시계를 쳐다봤다. 여섯시가 조금 넘었다. 그래. 대답하고 아까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매트리스 위에 놓여있는 차키를 집어들었다. 근데 아까 묻는 말을 묘하게 피한 것 같은데……. 생각이 들지만 그 거슬림을 묻어두기로 한다.


같이 밥을 먹은 날을 기준으로 몇 달 뒤에 지민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기분이 나쁜 것보단 놀람이 우선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잘 지낸 것 같은데 너는 그게 아니였나, 오늘따라 옷은 또 깔끔하게 입고 나와서는 평소와 다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나의 의지로 시작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두 점 사이의 시간동안 나는 그저 적당히 받아주고 대해주었을뿐이다. 물론 이 사이도 내가 아니라 지민이 먼저 시작한 것이지만 거절해본 것은 지민이 유일했다.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정리하면 나는 지민을 꽤 특별한 존재로서 사랑했다는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도 몇번 만났다. 만날 수 밖에 없는 구조였고 부득이하게 마주쳐도 얼굴을 찌푸리진 않을 수 있을만큼 괜찮게 끝낸 관계였으니 우연을 몇번 더 반복해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주로 만나서는 근황을 주고 받았다.
나는 내가 헤어지고 나서 감정에 어느정도는 타격을 입었겠거니 싶었는데 아니었던 것에 놀랐다. 그리고 지민도 별다른 고통이 없어 보여서 그것에도 또 놀랐다. 누가 더 이성적인가 생각해보면 지민보단 내가 조금 더 이성적인 편이었으니 나보다는 조금 더 울었겠지 예상했지만 너무나 멀쩡한 모습에, 속으로 혼자 했던 예측이 이기심과 바람인 것을 깨달았다. 쪽팔렸다.

“그래서 요즘 뭐하고 지내는데?”

커피는 싫어서 시킨 주스를 마셨다. 돈아까워서 잘 안시키는데 오늘은 입이 써서 또 쓴걸 붓고싶진 않았다. 지민은 반대로 새카만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뜨거운 김이 빠져나가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왜이렇게 반대가 된 것 같지.

“워홀 가려고요”
“어디로?”
“호주요”
“그렇구나…”

느닷없는 워홀 얘기에 몸이 살짝 들렸지만 잔에 손을 뻗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뒤로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지민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할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웃으며 빠져나가는 애를 올려다 보고 빈 자리를 한번 보는데, 싫다.
지민이 없는 자리를 보면서 느낀 내 감정이 너무 애같아서 싫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이 관계가 왜 곪아갈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된 것 같아 싫었다. 회피할 수도 없는 사실이 머릿속에 들어찬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고개를 내젓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휘두른다고 해서 사라질 생각도 아니었으니.

우위를 잃어버린 상황이 열받아서, 무게가 실려서 살짝 눌린 의자 시트의 흔적을 바라보며 지민의 부재를 다시금 실감하고 나는 욕을 했다. 아 씨발, 모든걸 망친건 나였나보다.


몇 달 뒤, 지민에게 메일 하나를 받았다. 누가보면 이전까지도 연락 주고 받은 친한 친구사이, 헐리웃의 시베리아보다 쿨한 커플관계인 줄 알 것 같은 행동이다. 지민의 이런 지속적인 연락이 싫긴 했지만 지민에게 가지고 있는 내 미련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냥 아는 지인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게 꼴이 좋아서, 덜 부끄러워서 나는 이것들을 씹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대신 속은 좀 썩어들어갔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잘 지내고 있다며, 자리를 잡은 곳이 딸기농장인데 ㅡ여기서부터 좀 웃겨서 피식대고 말았다ㅡ 형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왜? 떠올려보는데 모르겠다. 벌써 추억이 휘발되나보다. 사진까지 첨부한게 정성이었다. 영어도 못하는게 어떻게 찍어달라고 했지, 사진 속의 지민은 딸기 한박스를 가득 들고 웃고있었다. 배경은 그냥 초록에 밭이 가득한 것 같은데 프레임의 구석에 간판이 끼어있었다. 반토막이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그 알파벳들을 눈으로 여러번 훑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몇 시간 뒤 발을 내딛은 땅은 낯선 곳이었다. 공기도 건물도, 다만 하늘 하나만 유일하게 같았다. 계절이 반대라는걸 잊고있었다. 애매한 시기에 온게 다행이었다. 자켓을 벗어 손에 쥐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걸었다. 주어진 배경에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걱정 없이 충동적으로 진행한 일을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다는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버스와 택시를 타고, 사진 속 구석에 내 신경을 모조리 앗아간 간판을 찾았다. 발견해서 겨우 다시금 땅에 발을 붙였을 땐 밤이었다. 적막이 흘렀다. 아무래도 농장이고 꽤 시골이니 사람이 많진 않을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짧은 시간동안 한참이나 들여다 보느라 외워버린 풍경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눈으로 체크해나갔다. 여기가 지민이 서있던 지점, 그래서 삐죽 튀어나왔던 힌트, 나무로 만들어진 창고.
불이 켜진 창고 비슷한 곳으로 가 문을 두드리니 덩치 큰 남자가 나왔다. 지민을 물으니 이미 숙소로 돌아갔다고 했다. 머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해서 불러 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다. 남자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알았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별다른 짐 없이 여기까지 걸어온 내가 이상해보여서였는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지민은 나를 발견하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왜. 말하니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어요? 여기가 어딘줄 알고요? 언제온건데요? 왜 온건데요?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뒤의 거대한 나무판을 가리켰다.

“나 배고프다.”
“…”
“시간 조금만 내줘, 자는 시간좀 좀 아껴서”
“…알았어요”

지민은 아까 전화를 걸어준 사내에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아무렇게나 끼워입었던 점퍼를 제대로 여미며 나에게 눈짓했다. 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지민의 뒤를 따랐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는데 깨끗했던 신발에 흙이 잔뜩 묻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배고프다는 핑계로 끌고 나왔지만 나는 기껏해야 쉐이크 한잔을 시켰다. 계속해서 단게 땡기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민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와 같이 블랙커피다. 근데 이번엔 설탕을 몇스푼 넣고 휘휘 젓는데, 나는 이상하게 거기에서 안심했다.

“어떻게 온건데요 대체?”
“간판에 대문짝만하게 써있던데”
“그래서 그거로 찾아온거예요?”
“니가 보낸 메일 구조신호 아니었어?”

내 대답에 지민이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민망하지 않았다. 같이 웃었다.

“맞긴 맞죠… 힘들어 죽겠으니까요”
“사진에서는 좋아보이더라”
“집에 보내는건데 어떻게 울상을 해요”

그런거였냐…. 가족에게 보내는 것이었다는 말에 뭔가 바람빠지는 기분이 든다. 그냥 단체메일이었다는거잖아. 자의식 과잉의 결과였나 싶어 민망해진다.
별다른 말 없이 지민은 티스푼으로 의미없이 커피를 휘젓고 나는 빨대로 길다란 잔 속의 쉐이크를 젓는 동안 이 스케일 큰 여정의 엔딩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지민을 찾아가 얼굴도 봤고 대화도 나누었다. 할 일은 끝났고 이제는 돌아가야한다.

“이제 가야겠다”
“벌써요?”
“어, 여기서 할 일도 없고”
“그러면 순전히 나 보러 온거였네요?”
“…”

사라지고싶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부정도 못하겠어서.

“생각보다 낭만적이네요 형도.”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지민의 말에 구석의 시야로 돌렸던 눈동자를 옮긴다. 턱을 괴고 스푼을 내려놓고 나를 내려다보며 예전의 내 말을 그대로 읊는데 희한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많이 큰걸까. 대답이 없는 나를 보며 지민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쌤쌤이다. 그쵸”

저 말에 웃어버렸다. 그냥 너도 여전히 애구나. 끊어진 인연을 다시 묶어 매면서 나는 다시금 피어오르는 감정에 도취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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