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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지정

Kyefii 2017. 3. 12. 20:39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 이해해?

학년도 다르고 입는 체육복의 색도, 가슴팍에 달고다니던 명찰의 색도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알아봐서는, 스쳐 지나갈 때 한번 더 돌아보게되는, 안그러면 평생 뿌옇게 노란 살색의 덩어리로만 기억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빠뜨리는 사람.

나에게 정국은 그런 존재였다. 어딜가든 이상하게 나의 시야 속에 늘 걸리는, 한번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걸 알았지만 내 눈 속에 콕 찍힌 점인줄 알았다. 아무리 피하고 눈을 비벼도 사라지지 않은 채 거기에 있었기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는 그 형체에 결국 나는 그렇게 정국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 속에서 그 애의 크기를 인정하고, 실감한 후에는 그 애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그건 오로지 정국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뭐든 빠르게 배우고 금방 조숙해지는. 그렇게 못된 것도 금세 배워버리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섣불리 정의내리고 마는 사랑을, 기묘하게도 그 나쁜 바람은 정국과 나를 비껴가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하루에도 너댓번은 스쳐 지나가는 아파트의 복도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같음을 확인했다. 그 순간엔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애와 내가 향하는 사랑의 방향이 서로임은 당연했고 그것만이 중요했다.
집 하나를 건너 사는 그 애와 나는 스물네시간 중에 삼십분 씩을 같이 보내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어렸으니까 중요하고 거창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단어도 많이 모르니 좋아한다는 마음의 표현도 좋아해, 사랑해가 다였다. 하지만 감정도 저것이 다였다.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게 어떻게 생겼고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시간은 흐른다. 그런데 어째서 공간도 쪼개져야만 하는걸까, 적어도 사랑하는 순간엔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별안간 나는 이사를 가야했고 작별인사도 할 수 없었다. 떠밀리듯 차에 타고 창문으로 멀어져가는 아파트를 보면서,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네가 복도에 나와있진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복도는 작은 인영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학원에 간 모양이었다. 점점 속도는 올라가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만큼 달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옆에서는 피곤하면 자라는 엄마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피곤함보다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서로를 알고 지낸 순간부터 순차적으로 묻어버렸다. 많이 사랑하고 보고싶지만 말도 없이 사라진게 미안해서, 그냥 차라리 더이상 마주치지 않는게 더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꼭 만나야했는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찾은 것 만으로도 우리의 인연이 운명이라 생각했지만 그 인연이 이렇게 꼬이는 것도 운명이었을줄은 둘 중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엄마가 새롭게 만나고 재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소개시킨 사람은 예전의 누군가를 많이 닮아있었다. 그리고 불편하지만 참고 나간 자리에서 그가 닮은 누군가가 너였음을 알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얼굴을 확인하며 그대로 멈춘건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눈을 거뒀다. 입에 억지로 음식을 집어넣으며 웃는게 힘겨웠다. 테이블을 반으로 쪼갠다면 아마 왼편은 천국 오른편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식사는 짧게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오늘 모인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국의 생일이었다. 엄마가 내 손에 케이크가 담긴 박스를 쥐어준다. 한참이나 그 박스를 들여다 보다 훤한 비닐 필름 너머로 딸기가 가득 올라간 것을 발견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우리는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축하노래를 부르고, 물론 나는 박수만 치며 애의 표정을 확인했다. 까만 어둠속에서 송글거리며 초 끝에 맺힌 불빛에 밝혀지는 얼굴 위의 감정은 덤덤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볼을 부풀려 초를 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를 켰다. 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대화를 나누었다. 어색함 없이 대화에 섞이는 나를 보며 정국은 아까 그 불꽃 앞에서 짓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거들 수 있는건 지극히 일부분이었고 나는 슬금 대화에서 멀어졌다.

 나는 거실에서 불편하게 앉아있다가 어느새 가스불 앞에 멍하게 서있는 너의 뒷모습을 본다. 지금 일어나도 내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 조차 눈치 못챌 정도로 둘은 대화에 심취해있었다. 차라리 잠시 비켜주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억지로 접어앉았던 다리를 곧게 펴니 잠시 저릿했지만 비틀거리진 않았다. 나는 부엌으로 걸어간다. 눈 네개가 잠시 따라 올라오다 이내 서로를 마주보고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넓지 않은 집이라 몇걸음 걸어가니 코앞에 단정한 갈색 머리가 닿았다. 둘러보면 듬성듬성 파먹힌 케이크와 크림이 묻은 포크들과 접시가 쌓여있다. 불을 붙이자마자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불어버리는 바람에 미처 녹아 흘러내리지도 못한 초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요란한 흔적과 다르게 너는, 우두커니 고개를 숙이고 주전자만 내려다보고 있다. 왜 그러고 있어. 말을 붙여보지만 대답이 없다.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괜찮아? 그제야 대답 대신 진동이 온다. 고개를 젓는 것이다.
감싸안은 몸이 작게 흔들리기에 나는 재빠르게 뒤를 살핀다. 여전히 이쪽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가스불을 줄이고 정국의 손을 잡아당겼다.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공간에서, 절대로 시선이 닿지 않을 사각지대에서 나는 애의 어깨를 잡고 상태를 살핀다. 정국아. 부르지만 여전히 입도 벙긋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한숨을 한번 쉰 다음 말했다. 좋은 날이잖아. 고개를 든 얼굴이 애매한 표정이다. 우는건지, 화가 난건지. 뭐가 좋아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느릿하게 불툭하게 나온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오늘 네 생일이잖아"
"그게 뭐요"
"안좋아?"
"별로예요"
"선물 줄게"

그 말에 이리저리 둘러보는 눈이 귀엽다. 주머니도 납작하고 두 손도 자연스럽게 기대고있는 조리대에 얹어둔걸 확인한 정국이 재미없다는 표정을 한다. 기분 풀어주는 농담치고는 짜증나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나는 살짝 강하게 애의 팔을 잡고 힘없이 돌아오는 다시 돌아오는 애의 얼굴과 눈을 마주치며 뺨을 잡고 키스를 했다. 당황함이 번지는 얼굴과 감지 못한 눈이 빠르게 옆으로 굴러간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거실의 상황에 정국은 그냥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감기는 눈을 확인한 후에야 나도 눈을 감았다.

축하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입술을 떼며 한 내 말에 정국이 머뭇거리다 다시 입술을 부딪혀왔다. 나는 가까이 붙는 정국의 어깨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그냥 끌어안는다. 서툴게 입술을 맞대고 입 속의 숨을 교환하고 긴 시간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작게 바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몸을 떼고 서로의 눈 속에 깊이 담긴 자신을 바라보다가 정국이 먼저 몸을 돌려 가스불을 끄고 컵을 꺼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찬장에서 티백을 찾았다.

처음, 그리고 마지막. 이렇게 두번이라고 해요. 하나로 퉁치는건 별로니까.

정국이 중얼거렸다. 일부러 혼잣말마냥 중얼거리지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어. 내가 잔 속에 마른 티백을 집어넣으면 정국이 그 속으로 뜨거운 물을 붓는다. 닿을듯 말듯 한 우리 틈 사이로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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