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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tch /Case 2

뷔슈

Kyefii 2017. 3. 16. 21:19

 방안에 비 냄새가 가득 찼다. 새벽 내내 시끄럽다 했는데 아침까지도 비가 계속이었다. 좁아터진 집이지만 그래도 방을 열고 나가니 손바닥만한 공간에서도 특유의 물비린내가 났다.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는동안 잠깐 본 칙칙한 하늘을 생각하면서 모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싫었다. 시간개념도 행동도 뭔가 약간씩 굼뜨게 되는 느낌에 저도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학교는 기어코 애들을 불러냈다. 등교길에 보이는 놈들 중에 멀쩡하게 신발을 신은 놈은 없었다 대다수가 교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찍찍 소리나게 끌었다. 시선을 높이는 것도 귀찮아져 바닥에 떨구고 걷는 중간에 유난히 하얀 발이 눈에 들어온다

"윤기형"

 기운없이 걷는 걸음걸이 마저도 형이었다. 느릿하게 고개가 돌아가며 나를 쳐다보고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대답하는 목소리가 작았다. 어. 별 다른 대답도 없이 부르는 말에 대답할 뿐이다. 얼른 우산을 접고 형의 손에서 우산을 뺏어들었다. 일찍일어났네요 형. 냉큼 말을 붙이니 피곤한듯 잠에 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 소리가 시끄러워서... 얼굴을 보니 정말로 잠을 못잔 듯 퀭한 얼굴에 마음이 상해 우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심시간에 시간이 남아 습관적으로 한 층을 더 올라갔다 교실에 찾아가면 항상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부리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여느때 처럼 책상에 납작하게 엎드려 얼굴은 창가쪽으로, 교과서의 나풀거리는 반쪽들로 얼굴을 가리고 자고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리가 휑했다. 엥 싶은 얼굴로 자리 한 번 교실 한 번 둘러보다 하도 찾아온 탓에 얼떨결에 친해진 호석형과 눈이 마주쳤다. 윤기 어디 갔다. 어디로요? 그러자 형이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맨 끝 교실로… 친한척 하며 어깨에 팔두르고 가더만…. 주어가 빠진 말이지만 더러운 기분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복도를 뛰었다. 원래 더러운 기분은 틀린 법이 없고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한다.
 여분의 책상과 의자를 쌓아두는 맨 끝 교실은 보통 불건전한 행동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고 가끔은 나 또한 쳐박혀있던 곳이기에 거기의 역할을 잘 안다. 그래서 형은 거기에 있으면 안됐다.


 소리나게 문을 열었을 때 형은 낯익은 얼굴들에게 둘러쌓여있었다. 그 익숙한 얼굴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신경쓰지 않고 쓰레기같은 덩어리들의 틈새로 그의 상태를 살핀다. 하복 단추가 너댓개는 풀린 채로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서 애써 떨지 않는 척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모습에 마구 부푼 불안과 제멋대로 날이 선 상상이 닿아 결국 터져버리고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건지 분별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는 개새끼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형의 손목을 잡고 냅다 달려버렸다. 당황한 목소리로 야, 하고 부르는 형의 다리가 엇박이었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순 없었다. 


 점심시간 소란의 여파로 결국 얻어터진 얼굴을 하고 이대로 집에 들어갈까 하다 가뜩이나 맞은 것도 아픈데 엄마에게 날아올 손바닥이 조금 걱정되어 형의 집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 집에는 형밖에 없으므로, 고마우면 문을 열어줄 것이다. 집 앞에서 익숙하게 문을 두들기니 대답이 없어 벨을 마구 눌렀다. 그제서야 철컥 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
 뭐냐? 문을 연 틈새로 얼굴을 확인한 형이 묻기에 그냥 웃어보이면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못났다, 눈이 말했다. 나 들어가? 묻는 말에 쳐다보지 않고 문은 열어둔 채로 뒷편의 서랍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대답했다. 여기가 무슨 양호실이냐. 나는 얼른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섰다.
 내가 얌전히 앉아있는동안 형은 허리를 굽혀 서랍장을 뒤적이더니 연고와 밴드를 꺼낸다 그 사이에도 마른 몸 탓에 티셔츠가 헐렁한 것이 더 눈에들어와서 나는 괜히 밖을 내다보았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내일도 비온다던데, 따위의 혼잣말도 뭣도 아닌. 물론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둘이 남으면 내가 말을 하는 편이고 형은 대충 대꾸를 해주는 편이었는데 둘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이 하나 있다면 박지민에 관한 것들은 얘기하지 않는다 였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형은 의외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라 눈치챌 수 밖에 없었다. 박지민의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면 그 이름을 말하는 나조차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내 주절거림이 끝나면 가만히 있다가 한 말을 되묻기도 하고, 그러나 꼭 이름은 말하지 않는. 걔, 그새끼, 이름을 말하면 죽는 것도 아닌데 지칭하면서도 꼭 괜히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문제는 저런 모습들에서 행동의 이유를 읽어버린 탓에 암묵적인 약속을 지키려 애쓰다가도 억울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괜히 더 찔러보게된다. 나를 떠올리며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이 또 보고싶고 귀엽고 구질구질하지만 형이 나를 좋아했다면 저랬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 싶어서.

"근데 형은 박지민 이름만 말해도 싫어하더라"

 하고 찌르면 또

"…너 그만좀 와라"

 막아버린다. 다른날이라면 애써 다른 이야기를 했겠지만 오늘은 어째 더 서러워져서 진심을 말해버렸다. 

"걔한텐 이런말도 안할거잖아"

 투박한 손으로 연고가 얹힌 곳에 밴드를 붙이는 형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남은 면의 밴드를 떼어내 잘 붙도록 근처를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정말로? 되물어보려다 생각보다 꽤 섬세해서 상처 주위로 밴드가 잘 붙었는지 눈가를 문지르는 형의 손 끝의 무게에 더 집중하려 입을 다물었다. 비 내리는 소리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조용한 방까지 들이쳤다. 아니야 라는 말 한마디에도 기분이 널을 뛴다. 


 나는 집에 가려면 낮은 지대에 있는 낡은 돌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는데 얼핏 듣기로 그 아래의 천이 장마라 심하게 불었다고 했다. 상처를 다 치료하고 베란다에 나가 내다본 밖에는 맞으면 분명 죽을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있었다. 결국 집에가는건 포기하고 형의 집에서 물이 줄어들 때 까지 잠시 있기로 했다. 있어도 되냐는 말에 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대답하지 않음이 긍정임을 안다.

 그날 밤 형은 옆에 사람이 있으면 잠을 못잔다며 나를 다른 방으로 밀어넣었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밤새 형의 방에서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웅크린 채로 부들대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심스레 뒤에 가 눕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형은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았다. 이런데 무슨 잠이 안온다고, 뚜렷한 이유가 존재하는 배신감에 울컥했지만 그래도 나를 안아오는 형을 같이 안을 수 있다는 그것에 만족해야했다. 평소의 형은 나를 절대로 안아주지 않을 것이다

 점점 품 안으로 파고드는 형의 머리칼이 턱 근처를 간질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뒷통수를 쓰다듬는다 무슨 용기가 나서인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항상 하고싶었던걸 했다.
 그러자 고개를 든 형이 어깨에서 목으로 걸쳐진 팔을 옮겼다. 그리고 닿아오는 형의 입술과 당황스러움에 다물린 내 입술 사이를 갈라오는 혀. 결국 나는 피할수도, 사실은 피하고싶지 않은 이 순간에 감사하며 함께 혀을 섞는다. 잠깐을 그러다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박지민… "

 낯익은 이름을 부르며 살풋 뜨는 눈과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가 누군지 분명히 보았지만 형은 눈을 감아버린 뒤 약하게 나를 밀어냈다. 거부였다. 왜 박지민의 이름은 부를 수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의 나는 안되는걸까.
 방금까지 얽힌 혀와 숨이 모두 없었던 일인 것 처럼 몸을 돌리려는 형의 어깨를 잡아 누른다 아픈듯 인상을 쓰려다 애써 표정을 푸는 것 때문에 화가 났다. 형. 불러도 대답하지 않아 이름을 부른다. 민윤기. 마지못해 뜬 눈이 밤인 탓에 반사되는 빛 하나 없이 새카맸다. 어둠이 익숙해진 탓에 숨길 수도 없는 상태에서, 분명 아래에서 올려다본 내 얼굴은 참담한 상태일 것이다.
 목끝까지 하고싶은 말이 찬다. 형은 나랑 키스한거야. 박지민이 아니라 김태형이랑. 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아래에 깔린 민윤기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도 바라던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어 집밖을 뛰쳐나왔다. 급하게 나오느라 벗어두고 온 교복도 휴대폰도 모두 그대로 형의 집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나는 도망치고싶었다 그 눈을 마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젖은 그 눈이 흐리멍텅하게 나를 쳐다보고 물어볼 것이다. 왜 니가 여기 있어? 그러면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온몸을 얻어맞는 것 처럼 내리는 굵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 웅덩이를 생각없이 밟아버리고. 눈앞이 자꾸 흐려저 손바닥으로 계속 물기를 닦아내다 문득 온도가 조금 다른 것은 인정하기 쪽팔리지만 비죽비죽 눈물이 기어코 나는 것이다 왜 죄책감과 패배감을 느껴야 하는지.
 자꾸 발을 거스르는 물길을 꾸역꾸역 밀어가며 걸었다. 슬슬 떨리는 몸에 팔뚝을 감싸안고 생각한다. 언젠가 또 비가 세차게 내릴 때에 당연히 나를 찾지 않고 박지민을 찾을 것이라는 불신과, 그리고 이 모순된 마음이 벌써 몇년이나 된 것을 보면 이젠 지긋한 짝사랑 그만할 법도 한데, 일부러 제 마음을 모르는 척 하는 민윤기를 미워할 수도 없어서. 

 그러나 무엇이 되더라도 나는 아마 내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형의 집에 가야한다 그 집에는 내 교복과 휴대폰과 형이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형이 있으니까,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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