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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괜찮냐?" 태형이 물었다. "아뇨." 정국이 대답했다. 태형이 손가락으로 정국의 눈 밑을 쭉 그으며 걱정아닌 걱정을 했다. 잠은 좀 자? 아뇨. 정국은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옆에서 책상 위로 엎어지는 정국을 보며 태형은 조금 미안한 마음에 제 휴대폰의 녹음을 키고는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밤색 뒷통수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야 정국아 수업 걱정하지 말고 자.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고개도 들지 않고 휘젓던 정국의 손이 툭 떨어졌다. 웅얼거리던 소리가 멎고 등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지민이 집을 나간게 4일 전이었으니 정국이 잠을 설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평소에도 지민이 학교에서 밤을 새는 일은 잦았기 때문에 혼자 자는 것이 불면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혼자 좁아 ..
결국 자리를 박차고 술집을 나가는 지민에 술을 따르던 태형의 손이 멈췄다. 야 넘친다! 놀란 소리에 저도 당황했는지 그 작은 소주잔에 병을 채로 부어버린 태형이 연신 미안하다 사과를 하곤 이미 사라진 지민의 뒤를 쫒았다. 지민은 멀리가지는 못하고 가게 앞의 가로등에서 담배를 물고 틱틱대며 가스가 다 닳은 라이터에 성을 내고 있었다. 불 붙여줘? 태형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지민이 결국 바닥에 라이터를 내던지고는 태형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라이터가 나뒹구는 소리는 오토바이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않았다. 지민은 태형을 쳐다보다마자 화를 냈다. 야 너는 어떻게 그럴수있냐? 태형이 놀라 살짝 뒷걸음질쳤다. 뭐가. 내가 지난동안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니가 이럴 수 있냐고. 속사포처럼 제 속상함을 뱉어내는 지민에 ..
방안에 비 냄새가 가득 찼다. 새벽 내내 시끄럽다 했는데 아침까지도 비가 계속이었다. 좁아터진 집이지만 그래도 방을 열고 나가니 손바닥만한 공간에서도 특유의 물비린내가 났다.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는동안 잠깐 본 칙칙한 하늘을 생각하면서 모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싫었다. 시간개념도 행동도 뭔가 약간씩 굼뜨게 되는 느낌에 저도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학교는 기어코 애들을 불러냈다. 등교길에 보이는 놈들 중에 멀쩡하게 신발을 신은 놈은 없었다 대다수가 교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찍찍 소리나게 끌었다. 시선을 높이는 것도 귀찮아져 바닥에 떨구고 걷는 중간에 유난히 하얀 발이 눈에 들어온다 "윤기형" 기운없이 걷는 ..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 이해해? 학년도 다르고 입는 체육복의 색도, 가슴팍에 달고다니던 명찰의 색도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알아봐서는, 스쳐 지나갈 때 한번 더 돌아보게되는, 안그러면 평생 뿌옇게 노란 살색의 덩어리로만 기억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빠뜨리는 사람. 나에게 정국은 그런 존재였다. 어딜가든 이상하게 나의 시야 속에 늘 걸리는, 한번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걸 알았지만 내 눈 속에 콕 찍힌 점인줄 알았다. 아무리 피하고 눈을 비벼도 사라지지 않은 채 거기에 있었기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는 그 형체에 결국 나는 그렇게 정국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 속에서 그 애의 크기를 인정하고, 실감한 후에는 그 애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그건 오로지 정국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지민이 내민 선물에 나는 좀 놀랐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이건 좀 무리였을텐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앞에서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굴었다. 몸 어디 뭐 하나 판거 아니야? 놀리는데 거기에 대고 지민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으면서 남은 목숨이 걱정되긴 한다고 받아쳤었다. 그러고 며칠 뒤 집에 찾아갔을 때 자주 보이던 물건들이 몇개 없어진 것 같아 물으니, 뭐라고 정확하게 대답하지는 않고 턱 끝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다 그거에 갈아 넣었어요. 그 말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뭘 팔긴 팔았구나 싶어 뭔가 찡하다가도 머리 어딘가 구석은 제멋대로 굴러갔다.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이게 주고 싶었나, 고맙긴하다만. “생각보다 낭만적이다 너” “내가요?” “그냥 소설 같아서” 반지를..
정국은 원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중국어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어떻게 여지껏 지내왔나 보면 그건 첫째로 정국이 잘생겼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어느정도 눈치가 있는 덕분이다. 집은 호의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부자 여자가 마련해주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돈은 어쩌다가 생긴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아도 죽을지경은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서 정국은 하루가 무료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예전엔 이만큼 무기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러다간 배 굶어죽기전에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던 정국은 일을 구하기로 했다. 살고 있는 집의 근처에는 세탁소가 있다. 그래봤자 지키는 사람 없이 거대한 세탁기가 어지러울만큼 놓여져있고 작동도 빨래를 하러 온 손님들이 코인을 넣으면 알아서 돌아간다. ..
다섯번 째 만나는 날에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이 조금 연하다면 몇번 더 만나보면 될텐데요 진해질 때까지 사실 우리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니예요 마주쳤을 때 인사 받아주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는 정도긴 하지만" 우리는 까탈스러운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이 까탈스러운 것인지 날씨가 그랬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분명 그 날은 좀 고된 날이었다. 언덕길이었고 햇볕은 살이 따가울 만큼 강렬했다. 왜 하필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을 가자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여튼 가면 좋겠지라는 생각에 넣은 코스였고 그 순간엔 계절을 따지지 못한 제 머리를 각자 쥐어박는 중이었다.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었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서로 좋다고 정했던 것이니까. ..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3을 가리키는 바늘에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긴 바늘이 6을 가리킬 때 벨이 울었다. 전화를 받아든 윤기의 귓가에 지민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와도 돼. 윤기는 알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키를 챙겨 집을 나왔다.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빈 오피스텔의 복도에 울렸다. 지민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윤기는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높은 발판을 준비해올까 고민했다. 그는 지민의 재능을 알았다. 충분히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여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속이 탔다. 대본이란 대본은 잔뜩 끌어다모아 가져다주고 의기소침..
아마 휴게소에서였을 것이다. 조금 먼 곳에서 새벽부터 불려가 촬영 보조를 했다. 아는 사이면 더 굴려먹는다는게 한톨도 틀린 말이 아니라 자고 일어났을 땐 온몸의 근육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좀 나았다. 장소가 지방이었던 터라 운전을 하러 내려갈 때에도 형과 교대를 했고 올라오는 길에도 똑같이 했다. 둘 다 각자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올라오다가 중간에 방을 잡아 자고 올라올 수 있을만큼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중간에 차를 대놓고 쪽잠을 자고 일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가 계속 해도 된다고 했지만 형은 굳이 교대를 하자고 했다. 그 제안에 형의 미숙한 운전실력에 대한 불안함이 깔려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피곤함이 이겼다. 졸다가 죽으나 불안해하다 죽으나 그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