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놀았어? 묻는 말에 잘도 웃으면서 대답한다. 응 재은이랑 놀았어 밥엔 당근 나와서 싫었어. 여느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여섯시면 끝나는 민정이의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안고 집까지 걸어오는 평화로운 저녁, 시월 초입의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코끝이 조금 시려운지 귓가에서 킁하는 소리가 난다. 추워? 아니 눈을 마주치고 이런저런 나중엔 기억도 나지 않을 질문들을 하다 다다른 대문 앞에서 그의 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구두코, 들린 것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정국아" 지민이 돌아왔다. 양 손에는 커다란 짐가방 두개를 들고, 민정이를 한번 보더니 씩 웃는다. 안녕? 민정이는 그 웃음이 맘에 들지 않는지 정국의 어깨로 몸을 더 틀었다. 누구야? 작게 소곤거리며 묻기에 정국이 똑같이 목소리를 줄..
나는 외국에 가본적은 없지만 그의 배 위에 엎어져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생각하곤 했다 우리가 거기를 거닐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금 쌀쌀한 날씨에 나는 커피를 들고 형은 우산을 들고있는거에요 아무래도 그런 도시의 길엔 사람이 많겠죠 그럼 형은 내가 커피를 쏟지 않도록 남은 손으로 내 어깨를 끌어안아주어야 해요 지민은 제 가슴 위에 고개를 얹은 채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정국을 본다 장단을 맞춰줄까 생각하며 따라 눈을 감는다 나는 어두운 남색빛이 도는 코트를 입고 까만 장우산을 쓰고있을거야 왼손으로는 네 어깨를 잡고 남은 손으로는 우리가 같이 비를 피할 수 있는 큰 우산을 들고있지 옆으로는 복잡하게 차가 막혀있어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도 들릴테고 네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바쁜듯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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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은 다리를 꼬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낡은 창고주제에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작은 탁자, 세개의 소파,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공간을 밝히는 조명. 있을만한 것은 다 있는 공간에 있어야 하는사람도 모두 모였다. 지민, 거래를 위해 찾아온 손님, 그리고 정국. 실제로 거래를 하는 것은 정국과 손님이고 지민은 브로커로, 깔끔한 거래를 위한 증인으로서 자리에 참여했다. 정국을 소개하자면 이 구역 내에서는 약을 직접 만들고 파는 유일한 조직의 리더였다. 조직이라고 해봐야 약만 주면 뭐든 하는 미친놈들을 모아 꾸린 그룹이지만 중독된 사람들을 얕잡아볼 수는 없다. 정국을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는 첫마디는 "생각보다 어리구만?" 오늘 만난 손님도 어김없이 그의 어린 외모를 비아냥거린다. 그도 ..
모질게 굴어도 옆에 남아있는 사람의 마음은 뭘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국은 물었다. 이렇게 좆같이 굴어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지민은 앞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 그런 소릴 해. 둘 다 만날 만큼 만나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험난한 연애 짧고 달았던 연애 그리고 서로를 만났을 때 또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이 사람 괜찮겠지, 라는 희망으로 시작했을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된건-오로지 정국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형이 나를 더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이건 서로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더 받는 것은 과분하다. 이건 정국이 자신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더 받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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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퍼는 뛰었다. 뛰고 또 뛰어서 모퉁이를 돌아 커다란 쓰레기 수거함 옆에 몸을 숨겼다. 달리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으려 세게 움켜쥔 지폐가 온통 구겨져 찢어질 듯 헤졌다. 오늘은 일진이 좋은 날은 아니었다. 얌전히 구멍 내주고 돈 받고, 약을 예약받은 뒤 조용히 사라지려했을 뿐인데 이 덩어리새끼가 욕심을 부렸다. 옷을 걸치려는 캐스퍼의 허리를 끌어안고 역겹게 상처난 날개뼈에 입술을 묻기에 그대로 몸을 돌려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워낙에 얇은 허리였던지라 물살이 덕지덕지 붙은 덩치의 팔뚝은 그를 꽉 안지 못했고 덕분에 빠져나오기 수월했다. 다만 품에서는 쉽게 탈출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맞은 것에 열이 받았는지 원래 줘야하는 돈도 주지 않으려 하기에 캐스퍼는 협탁위에 아까까지 주려던 돈을 들고 도망쳤다..
제니, 너 요즘 손이 통 느리다고. 마마가 일 그렇게 하면 너 잘라버린대. 데이지가 지민의 근처에서 풍선껌을 불며 말했다. 나만큼 이런 일 닥치고 하는사람이 누가있다고 그래? 지민이 덜그럭거리는 유리잔들을 닦아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대답했다. 데이지는 타이트한 유니폼의 단추를 하나 더 풀면서, 아니 그냥 그러더라구. 근데, 너처럼 나같은 아름다운 여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없거든. 제이미 너 진짜 게이 아냐? 처음 말을 건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데이지의 수다에 지민은 잠깐 행동을 멈추고, 아니 그냥 사람에 관심이 없는거야. 그렇게 대답하려다 관뒀다. 지민은 마지막 접시를 식기세척기에 넣고, 젖은 손을 마른 수건으로 닦은 후 데이지의 단추를 잠궈주면서 말했다. 이러면 더 안예쁜거 몰라? 그리..
정국이 지민의 집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것 중 지민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목욕용품이 가득한 바스켓이었다. 다양한 향의 바디워시와 로션 그리고 여성용인듯한 화려한 디자인의 바디미스트 등이 그 안을 채웠다. 그 땐 단순히 씻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항상 정국을 만나면 좋은 향이 났던 것을 떠올리며 바스켓의 워시들에서 향을 상상하고 장면을 생각한다. 지민에게 그것들은 그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지민이 정국과 크게 다투는 일이 있었을 때, 심지어 나중에 그것이 지민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던 날에 정국은 지민과 크게 말다툼을 하다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집에 작게 욕을 하고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거..
조금 유난이라고 느낄 때는 수도 없이 많다. 지나가면서 보는 물건이나 피부에 닿아오는 바람 온도 모든 것들을 연결지으며 속으로 얼굴을 그리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좋아하는 마음이 주체가 안되네, 가방끈을 괜히 다시 조절하고 지하철에 올라타 문에 얼굴이 비칠 때 까지 지민은 내내 정국의 생각을 했다. 새카만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창에 비친 웃는 얼굴이 못생겨 민망함을 느꼈을 때 그때서야 겨우 생각하기를 멈췄다. 듣고있는 수업은 매일이 같았다. 평소처럼 출력한 수업자료에 몇마디 설명을 메모하고 스크린에 띄워진 자료들을 보며 착실히 수업을 듣던 중 갑자기 교수의 말 한마디가 귀로 날아와 박힌다. 시간 지나면 모두 촌스러워 지금은 재밌고 세련되어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또 유치해보인다고… 그냥 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