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괜찮냐?" 태형이 물었다. "아뇨." 정국이 대답했다. 태형이 손가락으로 정국의 눈 밑을 쭉 그으며 걱정아닌 걱정을 했다. 잠은 좀 자? 아뇨. 정국은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옆에서 책상 위로 엎어지는 정국을 보며 태형은 조금 미안한 마음에 제 휴대폰의 녹음을 키고는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밤색 뒷통수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야 정국아 수업 걱정하지 말고 자.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고개도 들지 않고 휘젓던 정국의 손이 툭 떨어졌다. 웅얼거리던 소리가 멎고 등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지민이 집을 나간게 4일 전이었으니 정국이 잠을 설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평소에도 지민이 학교에서 밤을 새는 일은 잦았기 때문에 혼자 자는 것이 불면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혼자 좁아 ..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 이해해? 학년도 다르고 입는 체육복의 색도, 가슴팍에 달고다니던 명찰의 색도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알아봐서는, 스쳐 지나갈 때 한번 더 돌아보게되는, 안그러면 평생 뿌옇게 노란 살색의 덩어리로만 기억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빠뜨리는 사람. 나에게 정국은 그런 존재였다. 어딜가든 이상하게 나의 시야 속에 늘 걸리는, 한번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걸 알았지만 내 눈 속에 콕 찍힌 점인줄 알았다. 아무리 피하고 눈을 비벼도 사라지지 않은 채 거기에 있었기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는 그 형체에 결국 나는 그렇게 정국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 속에서 그 애의 크기를 인정하고, 실감한 후에는 그 애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그건 오로지 정국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정국은 원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중국어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어떻게 여지껏 지내왔나 보면 그건 첫째로 정국이 잘생겼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어느정도 눈치가 있는 덕분이다. 집은 호의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부자 여자가 마련해주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돈은 어쩌다가 생긴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아도 죽을지경은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서 정국은 하루가 무료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예전엔 이만큼 무기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러다간 배 굶어죽기전에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던 정국은 일을 구하기로 했다. 살고 있는 집의 근처에는 세탁소가 있다. 그래봤자 지키는 사람 없이 거대한 세탁기가 어지러울만큼 놓여져있고 작동도 빨래를 하러 온 손님들이 코인을 넣으면 알아서 돌아간다. ..
다섯번 째 만나는 날에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이 조금 연하다면 몇번 더 만나보면 될텐데요 진해질 때까지 사실 우리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니예요 마주쳤을 때 인사 받아주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는 정도긴 하지만" 우리는 까탈스러운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이 까탈스러운 것인지 날씨가 그랬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분명 그 날은 좀 고된 날이었다. 언덕길이었고 햇볕은 살이 따가울 만큼 강렬했다. 왜 하필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을 가자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여튼 가면 좋겠지라는 생각에 넣은 코스였고 그 순간엔 계절을 따지지 못한 제 머리를 각자 쥐어박는 중이었다.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었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서로 좋다고 정했던 것이니까. ..
아마 휴게소에서였을 것이다. 조금 먼 곳에서 새벽부터 불려가 촬영 보조를 했다. 아는 사이면 더 굴려먹는다는게 한톨도 틀린 말이 아니라 자고 일어났을 땐 온몸의 근육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좀 나았다. 장소가 지방이었던 터라 운전을 하러 내려갈 때에도 형과 교대를 했고 올라오는 길에도 똑같이 했다. 둘 다 각자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올라오다가 중간에 방을 잡아 자고 올라올 수 있을만큼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중간에 차를 대놓고 쪽잠을 자고 일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가 계속 해도 된다고 했지만 형은 굳이 교대를 하자고 했다. 그 제안에 형의 미숙한 운전실력에 대한 불안함이 깔려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피곤함이 이겼다. 졸다가 죽으나 불안해하다 죽으나 그게 ..
1. 배탈 "형 서울가요?" "어? 응" 정국이 새롭게 오뎅을 꺼내며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은 정국의 옆에서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정국이 먹는걸 보고 있었다. 한참 잘 먹다가 뜬금없이 물어오는 정국에 지민이 한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정국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것 처럼 미적지근하게 대답에 반응했다. 손에 쥐고있는 오뎅을 간장에 툭툭 찍어 입에 넣는다. 이미 양 볼 가득 차 있음에도 또 한 입을 문다. 이미 정국의 옆엔 꼬치가 여럿 쌓여있었다. 그에 반해 지민은 두어개가 다였다. "형 나 국물 좀" "엉" 정국의 말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자를 집어들었다. 종이컵을 집어드는 손이 퍽 작아서 정국은 피식 웃었다. 데일까 무서워 조심조심 컵에 국물을 뜨는게 귀엽기도 하고. 자, 하며 저에..
정국은 지민과 나란히 섰다. 버스의 기둥을 잡고 익숙하게 하차벨을 누른다. 손에 가득 물건을 들고있느라 손잡이를 잡지못하고 발로만 버티던 정국이 버스의 급정거에 휘청였다. 지민이 넘어지려는 것을 겨우 잡았다. 멋쩍게 정국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안이러는데. 지민에게 잡힌 허리에 정국의 시선이 꽂혔다. 제 옆구리에 붙어있는 손을 빤히 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정면을 본다.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버스가 멈추고 지민이 먼저 내렸다. 정국은 지민의 뒤를 따라 내렸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번은 같이 걷는 길이다. 24시간 불이 켜져있는 밥집을 지나 편의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가로등이 오십걸음 간격으로 세워져있는, 그런 길. 아직도 등불의 색은 주황빛이고 아파트가 없는 동네라 빌라의 작은 창으로..
고생 많았다. 남자가 큰 손으로 정국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정국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구두 위로 개미 한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쳐다보며 일렁이는 눈에 힘을 주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풍경에 쉽게 섞일만한 종류의 작은 묘목이 둘의 앞에 박혀있었다. 남들처럼 작은 명패조차 걸고있지 않아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나무는 지민을 기억하는 이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그것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정국은 나무 앞에 차분하게 꽃을 내려두는 남자의 행동을 쳐다보다 그의 가자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먼저 떠나는 남자의 발만 쳐다보며 뒤를 따라갔다. 정국은 남자의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춰 걸었다. 차가 주차된 곳 까지 걸어가는 동안 남자는 정국에게 많은 것을 물..
전정국은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담임은 손에 남은 전정국의 졸업장을 흔들어보이며 졸업식 날에 오지않는건 좀 너무하지않냐며 쓸모없는 소리를 했다. 어쨌든 전달해주긴 해야했으니 사람을 찾는지 반을 한번 빙 둘러보다가 나에게 멈췄다. 그리고 내이름을 부르며 졸업장을 휘적였다. 너 정국이랑 좀 붙어다니는 사이였지? 네가 가져다줘라.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교탁으로 걸어가 걔의 것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담임이 남은 말들을 하는 동안 나는 남의 졸업장을 열어봤다. 내 것과 다르지않게 내용도 똑같지만 받는이의 이름만이 달랐다. 전정국. 나는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한번 문질거리다 덮었다. 살짝 까실한 졸업장 커버의 표면엔 먼지가 잔뜩 붙었다. 졸업식이면 대부분이 그렇듯 찾아온 가족과 점심을 먹고 다시 집에 ..
불쌍한 세대였다. 숨 터트려올 날만 기다리다 겨우 뱃속에서 빠져나와 붙어있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을 때 본 것들은 모두 메마른 것들 뿐이었다. 공기 중에 섞인 모래들과 바닥에 깔린 굵은 돌들, 그리고 풀 한 포기 붙어있지 않은 딱딱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절벽이 그랬다. 지민은 태어나서 세상을 많이 보고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가 자라온 환경에서 본 것들은 하나같이 축축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발 끝에 채이는 흙을 한 줌 쥐어보다 움켜쥔 손을 풀어헤치자 금세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조회시간은 지루했다. 세상이 망한지 몇세기가 지났다고 했다. 지민은 태어난 순간부터 ‘타운’의 아이였고 지민의 부모도 지구가 망한 이후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민이 아는 세상은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모두 똑같은 황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