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지민이 사준 캔커피를 잡고 손끝으로 괜히 미지근해진 캔의 외벽을 긁었다. 정적을 견딜 수 없어 발에 채일 것도 없는 깨끗한 아스팔트 바닥을 신발코로 쓸었다. 지민은 그런 정국의 행동을 지켜보다 제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마저 소리나도록 들이켰다. 머리 위의 가로등은 교체하지 않아 아직도 노란 카드뮴 조명이었다. 지민은 가만히, 그러나 부산스럽게 다른 짓을 찾느라 노력하는 정국의 머리를 쳐다본다. 원래도 그렇게 까맣지 않던 머리카락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기운없이 축 가라앉은 그 앞머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국아 나는 … 한참만에 들린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든다. 쥐고 있는 캔커피는 아직 반이나 남은 채로 손 안에서 찰랑거렸다. 제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입술을 쳐다보며 한글자 한글자 ..
여름방학 때마다 정국은 걔네 아줌마가 하는 슈퍼에서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는 선풍기 하나를 두고 계산이나 했다. 좁아터진가게라서 에어컨은 못두고 예전 상호 바뀐 회사의 고물 선풍기하나만 켜두고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들고 맞은편의 티비나 쳐다보면서. 지민은 그런 정국의 옆집으로 정확히 말하면 이젠 이사를 가서 걸어서 십오분 정도로 멀어진 거리에 산다. 그런데도 학교돌아오는 길에 꼭 심부름을 시키면 집 앞의 마트에 가지 않고 정국의 가게에 가서 사서 시원해야 할 것들도 죄다 미지근하게 덥혀온다. 방학이니 지민은 이제 학교에 갈 일도 없고 본인도 더운건 어쩔 수 없는지라 심부름은 집 앞 마트에 간다. 에어컨도 나오고 대체 어디서 믹스해온건지 모를 요상한 댄스곡들이 흘러나오는 마트에서 아이스크림도 사고 과자부..
지민의 관심이 끊긴건 일주일 전 부터였다. 평소에는 복도 저 끝에서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상태에서도 달려와서는 반갑다고 등을 때려대던게 엊그제같은데 요즘은 마주치기도 어렵고 마주쳐도 어색하게 웃는게 다였다. 징글징글했던 관심이 끊기다보니 생각보다 하루가 허전했다. 달라붙는 것을 귀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밀어내거나 장난쳐도 재미없다고 쪼는게 하루 중에 꼭 한번은 있었는데 사라지니 뭔가 자꾸 아쉬웠다. 몸에 밴 일과는 무서운 것이었다. 정국은 강의실을 나오며 건물의 끝을 쳐다봤다. 원래 이쯤 되면 내려올 때가 됐는데 계단에서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심 아쉬워하는 자신이 이상해서 정국은 괜히 카톡을 켰다. 몇일 전 과제를 물어보느라 보냈던 메세지에 공지를 복붙해서 보내온게 마지막이었다. 깜빡이는 창에 ..
내가 박지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된건 우연이었다. 그때 그는 내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자친구와 있었고 나는 카페의 창문 하나 없는 구석에서 형에게 훈계질을 당하고 있었다. 별로 듣고싶지도 않았기에 대충 몇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것들에 집중하다 그 커플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는데 마냥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헤어지려는 것 같았다. 그의 여자친구는 아이스 커피에 꽂힌 빨대를 몇번 만지작대다가 잡아서는 잔을 휘휘 젓고 못참겠다는듯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감상이 담긴 설명이다- 말을 꺼냈다. 둘의 대화가 조금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까지 들릴 수 있었던건 그날 따라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곡들이 잔잔했고 여자의 목소리가 보통 사람에 비해 조금 큰 편이기 때문이다. "지민아 넌..
지민은 지금 과제를 해야했다. 마감일이 몇일 남지 않았고 수업은 전공이었으며 레포트의 비중은 꽤 컸다 그러나 집중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 나라에 사는 모든 대학생이 그러하듯 하고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계는 새벽2시가 되어가고 있었고 켜놓은 구글과 논문검색 사이트는 메인페이지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드르륵거리며 휠을 굴리는 지민이 켜놓은 페이지는 시덥잖은 게시글이 올라오는 게시판이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일을 미루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유치한 유머글을 올리거나 신세한탄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시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던 지민의 손가락이 멈췄다. 별다른 말 없이 '랜덤 채팅' 이라는 단어 하나만 덜렁 써놓은 글이 위 아래로 길쭉하게 삐져나온 게시글의 제목 사이에서 무심하게 존..
그날 내가 실수하긴 했다. 술이 좀 취해있긴 했는데 형이 빨리 들어가라고 해서, 나는 그날따라 교수에게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들었고 조별과제엔 프리라이더가 뻔뻔히 단톡방을 나가고... 기분이 안좋아서 조금 과하게 투덜대며 대들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말았다. "아 형 진짜 꼴도보기도 싫어요" 그래서 형이 뭐라고 그랬더라. 아무말도 안하고 입을 다물고 한참 나를 쳐다보다 딱 그렇게 말했다. 알겠어. 그리고 손에 쥔 편의점 봉투를 나에게 건네주고 돌아가는데, 봉투 안에는 숙취해소 음료가 들어잇었고 형은 이미 두번째 가로등까지 걸어가버렸다. 정말로 길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봐도 내 잘못이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 싶었던건 그날 이후로 형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화가나고 내 얼..
포장마차에 도착했을 때 이미 형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잠들어있었다. 나는 형이 왜이렇게 약해졌나 생각해 본다. 꼭 예전에 비해 크게 성격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안하던 짓을 했다. 항상 데리러 오던 사람이 반대로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하거나 되지도않는 심술을 부려 집에 일찍좀 다니라는 잔소리까지 하면서 나를 과보호하기도 했다. 아프면 마음도 병든다던데, 이렇게까지 신경이 예민해진걸 보면 몸이 더 안좋아진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격까지 변할만큼 아픈 사람이 술을 퍼마시고 뻗어있으니,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잠깐 뒷목을 주무르다 일단 집에부터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엎어진 형을 업으려다 계산이 먼저인 것 같아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싶은 얼굴..
연애, 해봤어요? 방 안에서 정국은 카메라를 마주보고 있다 지민은 카메라 너머의 불편해보이는 의자에 그마저도 불편한 자세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를 바라본다 정국은 카메라를 쳐다봐야하는지 지민을 쳐다봐야하는지 망설이다 카메라를 택했다 저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내린 선택이었다 "해봤죠" "얼마나?" "그냥 뭐…" 어려보이는데, 한 서너번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묻는 지민에 정국이 속으로 얼굴을 떠올린다 손까지 꼽아가며 세어보는데 다섯번째 새끼손가락은 구부릴 수 없었다. 네번 맞네.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왜하시는거에요?" "캐릭터 쓸 때 좋을까봐요" "미리 정해놓으신 것 아니었어요?" "완전 백지에요" 시나리오도 없어요 사실. 그냥 등장인물이 다 죽는다라는 결론만 있지...
오늘도 잘 놀았어? 묻는 말에 잘도 웃으면서 대답한다. 응 재은이랑 놀았어 밥엔 당근 나와서 싫었어. 여느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여섯시면 끝나는 민정이의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안고 집까지 걸어오는 평화로운 저녁, 시월 초입의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코끝이 조금 시려운지 귓가에서 킁하는 소리가 난다. 추워? 아니 눈을 마주치고 이런저런 나중엔 기억도 나지 않을 질문들을 하다 다다른 대문 앞에서 그의 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구두코, 들린 것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정국아" 지민이 돌아왔다. 양 손에는 커다란 짐가방 두개를 들고, 민정이를 한번 보더니 씩 웃는다. 안녕? 민정이는 그 웃음이 맘에 들지 않는지 정국의 어깨로 몸을 더 틀었다. 누구야? 작게 소곤거리며 묻기에 정국이 똑같이 목소리를 줄..
나는 외국에 가본적은 없지만 그의 배 위에 엎어져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생각하곤 했다 우리가 거기를 거닐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금 쌀쌀한 날씨에 나는 커피를 들고 형은 우산을 들고있는거에요 아무래도 그런 도시의 길엔 사람이 많겠죠 그럼 형은 내가 커피를 쏟지 않도록 남은 손으로 내 어깨를 끌어안아주어야 해요 지민은 제 가슴 위에 고개를 얹은 채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정국을 본다 장단을 맞춰줄까 생각하며 따라 눈을 감는다 나는 어두운 남색빛이 도는 코트를 입고 까만 장우산을 쓰고있을거야 왼손으로는 네 어깨를 잡고 남은 손으로는 우리가 같이 비를 피할 수 있는 큰 우산을 들고있지 옆으로는 복잡하게 차가 막혀있어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도 들릴테고 네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바쁜듯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