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다리를 꼬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낡은 창고주제에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작은 탁자, 세개의 소파,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공간을 밝히는 조명. 있을만한 것은 다 있는 공간에 있어야 하는사람도 모두 모였다. 지민, 거래를 위해 찾아온 손님, 그리고 정국. 실제로 거래를 하는 것은 정국과 손님이고 지민은 브로커로, 깔끔한 거래를 위한 증인으로서 자리에 참여했다. 정국을 소개하자면 이 구역 내에서는 약을 직접 만들고 파는 유일한 조직의 리더였다. 조직이라고 해봐야 약만 주면 뭐든 하는 미친놈들을 모아 꾸린 그룹이지만 중독된 사람들을 얕잡아볼 수는 없다. 정국을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는 첫마디는 "생각보다 어리구만?" 오늘 만난 손님도 어김없이 그의 어린 외모를 비아냥거린다. 그도 ..
모질게 굴어도 옆에 남아있는 사람의 마음은 뭘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국은 물었다. 이렇게 좆같이 굴어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지민은 앞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 그런 소릴 해. 둘 다 만날 만큼 만나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험난한 연애 짧고 달았던 연애 그리고 서로를 만났을 때 또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이 사람 괜찮겠지, 라는 희망으로 시작했을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된건-오로지 정국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형이 나를 더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이건 서로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더 받는 것은 과분하다. 이건 정국이 자신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더 받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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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지민의 집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것 중 지민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목욕용품이 가득한 바스켓이었다. 다양한 향의 바디워시와 로션 그리고 여성용인듯한 화려한 디자인의 바디미스트 등이 그 안을 채웠다. 그 땐 단순히 씻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항상 정국을 만나면 좋은 향이 났던 것을 떠올리며 바스켓의 워시들에서 향을 상상하고 장면을 생각한다. 지민에게 그것들은 그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지민이 정국과 크게 다투는 일이 있었을 때, 심지어 나중에 그것이 지민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던 날에 정국은 지민과 크게 말다툼을 하다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집에 작게 욕을 하고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거..
조금 유난이라고 느낄 때는 수도 없이 많다. 지나가면서 보는 물건이나 피부에 닿아오는 바람 온도 모든 것들을 연결지으며 속으로 얼굴을 그리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좋아하는 마음이 주체가 안되네, 가방끈을 괜히 다시 조절하고 지하철에 올라타 문에 얼굴이 비칠 때 까지 지민은 내내 정국의 생각을 했다. 새카만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창에 비친 웃는 얼굴이 못생겨 민망함을 느꼈을 때 그때서야 겨우 생각하기를 멈췄다. 듣고있는 수업은 매일이 같았다. 평소처럼 출력한 수업자료에 몇마디 설명을 메모하고 스크린에 띄워진 자료들을 보며 착실히 수업을 듣던 중 갑자기 교수의 말 한마디가 귀로 날아와 박힌다. 시간 지나면 모두 촌스러워 지금은 재밌고 세련되어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또 유치해보인다고… 그냥 흔하게..
지민은 바에 앉아 글라스의 테두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여자는 지민의 행동이 거슬리는듯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머리아파요, 그만해요. 그러자 지민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 너무 지루해서요. 그 말에 여자가 지민을 향해 몸을 틀고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여자는 미인이었으므로 슬쩍 미소지으며 말을 걸면 이 귀여운 동양인 남자가 분명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보는 얼굴이네요" "처음 왔으니까요" "혼자 온거에요?" "성격이 안좋아서요" 지민에게 여자의 호감을 사는건 어렵지 않았다. 워낙 지민과 웃고 말 몇마디를 나누면 누구든지 더 대화를 하고싶어 안달이었기에, 애인을 수십명씩 갈아치우는 사람도 예외..
가기 전 까지 몇번이고 당부를 했더랬다. 형은 너 평소에도 잘 하는거 알지만 그래도 귀찮다고 막 쇼파에서 자지 말고, 밥은 시켜먹을거면 꼭 밥으로 먹고. 나가기 바로 전 까지 현관 문 앞에서 캐리어를 손에 쥔 채로 잔소리를 하기에 대충 알았어요, 걱정도 많네. 하며 시원하게 대답은 했지만 사뭇 걱정된다는 얼굴로 지민이 나간 다음 정국은 바로 쇼파에 드러누워 지민 생각을 했다. 걱정은 정국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의미가 좀 다르지만 어쨌든 상대를 생각한다는 점에 있어선 같다. 정국도 나름대로 지민이 걱정되었다. 남이 듣는다면 우스울지 모르겠으나 출장 가서도 내내 저런 생각만 하면 어떡하지, 라는 오버스럽지만 충분히 가능한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뜬 생각을 하다 배가 우는 소리를 내기에 일단..
정국이 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비틀었다.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조용히 자르던 지민이 눈을 들어 그런 정국을 바라보았다. 불편하니? 그 말에 못마땅한 얼굴로 옷 매무새를 만지던 정국이 얼굴을 들고 지민과 눈을 마주쳤다. 아뇨 그건 아니고. 다시 나이프를 집어드는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제 접시의 고기를 자르며 지민이 몰래 미소 지었다. "불편한게 아니면 왜 음식이 줄지를 않아, 요즘 마른 것 같아서 데려왔는데" "먹고 있어요" 재빠르게 대답이 쫓아오고 그릇 위로 포크와 나이프가 머리위의 조명을 쪼개며 테이블 위로 어질러졌다. 하지만 자르는 보람도 없이 단 한조각의 스테이크도 정국의 입으로는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쥐고있던 것을 내려놓은 정국이 빈 입을 열었다. 오늘 저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