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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리를 박차고 술집을 나가는 지민에 술을 따르던 태형의 손이 멈췄다. 야 넘친다! 놀란 소리에 저도 당황했는지 그 작은 소주잔에 병을 채로 부어버린 태형이 연신 미안하다 사과를 하곤 이미 사라진 지민의 뒤를 쫒았다. 지민은 멀리가지는 못하고 가게 앞의 가로등에서 담배를 물고 틱틱대며 가스가 다 닳은 라이터에 성을 내고 있었다. 불 붙여줘? 태형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지민이 결국 바닥에 라이터를 내던지고는 태형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라이터가 나뒹구는 소리는 오토바이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않았다. 지민은 태형을 쳐다보다마자 화를 냈다. 야 너는 어떻게 그럴수있냐? 태형이 놀라 살짝 뒷걸음질쳤다. 뭐가. 내가 지난동안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니가 이럴 수 있냐고. 속사포처럼 제 속상함을 뱉어내는 지민에 ..
방안에 비 냄새가 가득 찼다. 새벽 내내 시끄럽다 했는데 아침까지도 비가 계속이었다. 좁아터진 집이지만 그래도 방을 열고 나가니 손바닥만한 공간에서도 특유의 물비린내가 났다.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는동안 잠깐 본 칙칙한 하늘을 생각하면서 모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싫었다. 시간개념도 행동도 뭔가 약간씩 굼뜨게 되는 느낌에 저도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학교는 기어코 애들을 불러냈다. 등교길에 보이는 놈들 중에 멀쩡하게 신발을 신은 놈은 없었다 대다수가 교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찍찍 소리나게 끌었다. 시선을 높이는 것도 귀찮아져 바닥에 떨구고 걷는 중간에 유난히 하얀 발이 눈에 들어온다 "윤기형" 기운없이 걷는 ..
지민이 내민 선물에 나는 좀 놀랐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이건 좀 무리였을텐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앞에서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굴었다. 몸 어디 뭐 하나 판거 아니야? 놀리는데 거기에 대고 지민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으면서 남은 목숨이 걱정되긴 한다고 받아쳤었다. 그러고 며칠 뒤 집에 찾아갔을 때 자주 보이던 물건들이 몇개 없어진 것 같아 물으니, 뭐라고 정확하게 대답하지는 않고 턱 끝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다 그거에 갈아 넣었어요. 그 말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뭘 팔긴 팔았구나 싶어 뭔가 찡하다가도 머리 어딘가 구석은 제멋대로 굴러갔다.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이게 주고 싶었나, 고맙긴하다만. “생각보다 낭만적이다 너” “내가요?” “그냥 소설 같아서” 반지를..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3을 가리키는 바늘에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휴대폰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긴 바늘이 6을 가리킬 때 벨이 울었다. 전화를 받아든 윤기의 귓가에 지민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제 와도 돼. 윤기는 알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키를 챙겨 집을 나왔다.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빈 오피스텔의 복도에 울렸다. 지민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윤기는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높은 발판을 준비해올까 고민했다. 그는 지민의 재능을 알았다. 충분히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여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속이 탔다. 대본이란 대본은 잔뜩 끌어다모아 가져다주고 의기소침..
윤기는 울리는 휴대폰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말았다. 맞은편의 남준이 물었다. 전화오는거 아니에요? 어 아냐. 대답했지만 계속 신경에 쓰이는지 테이블에서 떨다못해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쳐다보는 남준의 시선에 못이겨 결국 집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조용한 공간이다 싶은 곳에 다다르니 진동은 끊겨있었다. 부재중 통화 3통 이라는 텍스트가 화면에 떴다. 이걸 다시 걸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휴대폰이 짧게 울린다. 메세지였다. 윤기는 확인할까 망설였다. 요즘 세상은 너무 많은걸 드러나게 한다. 답장하고싶지 않은데 내용은 궁금해서 보고싶었다. 하지만 읽었을 때 사라질 숫자가 신경쓰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눈 딱 감고 메세지를 터치했다. 노랗게 뜨는 화면에 둥실 메세지가 떠올랐다. [점심은 먹..
둘이 어쩌다 같이 살게되었냐는 말에 대한 가장 노멀한 대답은 돈일 것이다. 둘이 쓰면 좀 더 싸잖아. 그러나 그 밖에 내가 형을 챙기는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선 평범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좋아서, 가 평범한 대답이기엔 형의 처지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자같이 보이지도 않는 집의 대문 근처에서 나는 서성였다. 12월 중순의 날씨는 지랄맞아서 낮에는 얄량한 햇살 덕에 조금 뜨끈하다가도 밤만 되면 매섭기 그지없는 바람이 뺨을 후려갈겼다. 오늘같은 날엔 눈까지 내리는 바람에 기다리는게 이렇게 고역일 수가 없다. 세워놓은 오토바이에 기대어 물고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기를 썼지만 자꾸만 사라졌다. 남은 손으로 바람막이 삼아 불꽃을 최대한 살려보려고 해도 사방에서 새어들어오는 바람을..
윤기는 시큰거리는 제 발목을 보며 예전에 교통사고로 잠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살아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고 병원밥은 먹을만 했지만 모든게 따분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제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잠깐 이동하더라도 지민의 부축이 필요했고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불편해 속으로 짜증만 쌓여갔다. 물론 그 방향은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 윤기는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눈앞의 지민은 가끔, 정말 가끔 일을 저지르고 제발이 저릴 때마다 짓는 표정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의 눈은 괜히 창가를 보고 맨날 짧다고 놀려대던 손가락은 아랫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은 불쌍하게도 지민의 앞니에 계속 씹혀진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끝..
그날도 정국은 울면서 들어왔고 태형은 그날도 제 집 바깥에 작게 만들어둔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애에게 태형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 "오늘도 까였냐?" 물으니 정국은 한껏 입을 다물고 올라오던 표정을 귀신같이 서늘하게 바꾸곤 "형이 뭘알아" 대꾸한 후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집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태형은 쫄쫄대며 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잠깐 멍하게 서있다 발등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때문에 흥건해진 슬리퍼를 내려다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슬리퍼를 끌며 자신도 집으로 들어가려다 잠깐 멈춰서 정국이 사라진 집의 대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태형은 활동적인걸 좋아하게 생겼고 역시나 싫어하진 않았지만 정적인 것들도 그만큼이나 좋아했다. 가장 의..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너는 가운데가 뻥 뚫린 쇼핑몰의 난간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난 꼭 이러고 있으면 형이 날 밀어버리는 상상을 하게되더라. 그래서 나는 뭐 그런 상상을 하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너는 웃으며 대답했지. 형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너한테만 그러는거야 인마. 내 말에 너는 또 웃으면서 난간에서 손을 떼고 내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붙어 걸었다. 사실 나는 네 질문에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내 집 앞까지 기어코 데려다주고 꺾어지는 골목길의 모서리에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인사하는 너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게 고작이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끌어안고 보내기 싫었던걸 알까, 생각하면서도 쑥쓰러워 절대 몰랐으면 하는 이기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