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 비 냄새가 가득 찼다. 새벽 내내 시끄럽다 했는데 아침까지도 비가 계속이었다. 좁아터진 집이지만 그래도 방을 열고 나가니 손바닥만한 공간에서도 특유의 물비린내가 났다.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는동안 잠깐 본 칙칙한 하늘을 생각하면서 모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싫었다. 시간개념도 행동도 뭔가 약간씩 굼뜨게 되는 느낌에 저도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학교는 기어코 애들을 불러냈다. 등교길에 보이는 놈들 중에 멀쩡하게 신발을 신은 놈은 없었다 대다수가 교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찍찍 소리나게 끌었다. 시선을 높이는 것도 귀찮아져 바닥에 떨구고 걷는 중간에 유난히 하얀 발이 눈에 들어온다 "윤기형" 기운없이 걷는 ..
그날도 정국은 울면서 들어왔고 태형은 그날도 제 집 바깥에 작게 만들어둔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애에게 태형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 "오늘도 까였냐?" 물으니 정국은 한껏 입을 다물고 올라오던 표정을 귀신같이 서늘하게 바꾸곤 "형이 뭘알아" 대꾸한 후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집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태형은 쫄쫄대며 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잠깐 멍하게 서있다 발등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때문에 흥건해진 슬리퍼를 내려다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슬리퍼를 끌며 자신도 집으로 들어가려다 잠깐 멈춰서 정국이 사라진 집의 대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태형은 활동적인걸 좋아하게 생겼고 역시나 싫어하진 않았지만 정적인 것들도 그만큼이나 좋아했다. 가장 의..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너는 가운데가 뻥 뚫린 쇼핑몰의 난간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난 꼭 이러고 있으면 형이 날 밀어버리는 상상을 하게되더라. 그래서 나는 뭐 그런 상상을 하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너는 웃으며 대답했지. 형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너한테만 그러는거야 인마. 내 말에 너는 또 웃으면서 난간에서 손을 떼고 내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붙어 걸었다. 사실 나는 네 질문에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내 집 앞까지 기어코 데려다주고 꺾어지는 골목길의 모서리에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인사하는 너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게 고작이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끌어안고 보내기 싫었던걸 알까, 생각하면서도 쑥쓰러워 절대 몰랐으면 하는 이기심이..
나는 내가 지독하게 나빴으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나쁜 짓이라곤 전화를 받지 않고 메세지를 씹는 것 따위였다. 이게 착해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지만 이건 착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였다. 겁이 많아서 할 수 없던 것들은 많았다 싸울 때 백번 내가 사과를 해야할 순간에 되려 뻔뻔하게 굴기 라던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기… 그러면 이것은 대체 뭐에 대한 겁이었을까. 그는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것도 아니고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뒤에 무시무시한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먹었던 겁은 지금 이 관계가 깨지면 어떡하지 에서 출발하는 현상유지실패에 대한 것이었다. 좋건 싫건 나는 이 상태가 그렇게 크게 불만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했다. 치명적인 약점이고 모든 패배의 요인이다. 내가 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