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는 울리는 휴대폰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말았다. 맞은편의 남준이 물었다. 전화오는거 아니에요? 어 아냐. 대답했지만 계속 신경에 쓰이는지 테이블에서 떨다못해 굴러다니는 휴대폰을 쳐다보는 남준의 시선에 못이겨 결국 집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조용한 공간이다 싶은 곳에 다다르니 진동은 끊겨있었다. 부재중 통화 3통 이라는 텍스트가 화면에 떴다. 이걸 다시 걸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휴대폰이 짧게 울린다. 메세지였다. 윤기는 확인할까 망설였다. 요즘 세상은 너무 많은걸 드러나게 한다. 답장하고싶지 않은데 내용은 궁금해서 보고싶었다. 하지만 읽었을 때 사라질 숫자가 신경쓰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눈 딱 감고 메세지를 터치했다. 노랗게 뜨는 화면에 둥실 메세지가 떠올랐다. [점심은 먹..
둘이 어쩌다 같이 살게되었냐는 말에 대한 가장 노멀한 대답은 돈일 것이다. 둘이 쓰면 좀 더 싸잖아. 그러나 그 밖에 내가 형을 챙기는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선 평범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좋아서, 가 평범한 대답이기엔 형의 처지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자같이 보이지도 않는 집의 대문 근처에서 나는 서성였다. 12월 중순의 날씨는 지랄맞아서 낮에는 얄량한 햇살 덕에 조금 뜨끈하다가도 밤만 되면 매섭기 그지없는 바람이 뺨을 후려갈겼다. 오늘같은 날엔 눈까지 내리는 바람에 기다리는게 이렇게 고역일 수가 없다. 세워놓은 오토바이에 기대어 물고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기를 썼지만 자꾸만 사라졌다. 남은 손으로 바람막이 삼아 불꽃을 최대한 살려보려고 해도 사방에서 새어들어오는 바람을..
고생 많았다. 남자가 큰 손으로 정국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정국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구두 위로 개미 한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쳐다보며 일렁이는 눈에 힘을 주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풍경에 쉽게 섞일만한 종류의 작은 묘목이 둘의 앞에 박혀있었다. 남들처럼 작은 명패조차 걸고있지 않아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나무는 지민을 기억하는 이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그것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정국은 나무 앞에 차분하게 꽃을 내려두는 남자의 행동을 쳐다보다 그의 가자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먼저 떠나는 남자의 발만 쳐다보며 뒤를 따라갔다. 정국은 남자의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춰 걸었다. 차가 주차된 곳 까지 걸어가는 동안 남자는 정국에게 많은 것을 물..
전정국은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담임은 손에 남은 전정국의 졸업장을 흔들어보이며 졸업식 날에 오지않는건 좀 너무하지않냐며 쓸모없는 소리를 했다. 어쨌든 전달해주긴 해야했으니 사람을 찾는지 반을 한번 빙 둘러보다가 나에게 멈췄다. 그리고 내이름을 부르며 졸업장을 휘적였다. 너 정국이랑 좀 붙어다니는 사이였지? 네가 가져다줘라.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교탁으로 걸어가 걔의 것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담임이 남은 말들을 하는 동안 나는 남의 졸업장을 열어봤다. 내 것과 다르지않게 내용도 똑같지만 받는이의 이름만이 달랐다. 전정국. 나는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한번 문질거리다 덮었다. 살짝 까실한 졸업장 커버의 표면엔 먼지가 잔뜩 붙었다. 졸업식이면 대부분이 그렇듯 찾아온 가족과 점심을 먹고 다시 집에 ..
불쌍한 세대였다. 숨 터트려올 날만 기다리다 겨우 뱃속에서 빠져나와 붙어있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을 때 본 것들은 모두 메마른 것들 뿐이었다. 공기 중에 섞인 모래들과 바닥에 깔린 굵은 돌들, 그리고 풀 한 포기 붙어있지 않은 딱딱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절벽이 그랬다. 지민은 태어나서 세상을 많이 보고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가 자라온 환경에서 본 것들은 하나같이 축축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발 끝에 채이는 흙을 한 줌 쥐어보다 움켜쥔 손을 풀어헤치자 금세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조회시간은 지루했다. 세상이 망한지 몇세기가 지났다고 했다. 지민은 태어난 순간부터 ‘타운’의 아이였고 지민의 부모도 지구가 망한 이후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민이 아는 세상은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모두 똑같은 황량..
윤기는 시큰거리는 제 발목을 보며 예전에 교통사고로 잠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살아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고 병원밥은 먹을만 했지만 모든게 따분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제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잠깐 이동하더라도 지민의 부축이 필요했고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불편해 속으로 짜증만 쌓여갔다. 물론 그 방향은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 윤기는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눈앞의 지민은 가끔, 정말 가끔 일을 저지르고 제발이 저릴 때마다 짓는 표정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의 눈은 괜히 창가를 보고 맨날 짧다고 놀려대던 손가락은 아랫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은 불쌍하게도 지민의 앞니에 계속 씹혀진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끝..
그날도 정국은 울면서 들어왔고 태형은 그날도 제 집 바깥에 작게 만들어둔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애에게 태형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 "오늘도 까였냐?" 물으니 정국은 한껏 입을 다물고 올라오던 표정을 귀신같이 서늘하게 바꾸곤 "형이 뭘알아" 대꾸한 후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집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태형은 쫄쫄대며 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잠깐 멍하게 서있다 발등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때문에 흥건해진 슬리퍼를 내려다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슬리퍼를 끌며 자신도 집으로 들어가려다 잠깐 멈춰서 정국이 사라진 집의 대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태형은 활동적인걸 좋아하게 생겼고 역시나 싫어하진 않았지만 정적인 것들도 그만큼이나 좋아했다. 가장 의..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너는 가운데가 뻥 뚫린 쇼핑몰의 난간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난 꼭 이러고 있으면 형이 날 밀어버리는 상상을 하게되더라. 그래서 나는 뭐 그런 상상을 하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너는 웃으며 대답했지. 형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잖아요. 나는 그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너한테만 그러는거야 인마. 내 말에 너는 또 웃으면서 난간에서 손을 떼고 내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붙어 걸었다. 사실 나는 네 질문에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내 집 앞까지 기어코 데려다주고 꺾어지는 골목길의 모서리에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인사하는 너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주는게 고작이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끌어안고 보내기 싫었던걸 알까, 생각하면서도 쑥쓰러워 절대 몰랐으면 하는 이기심이..
나는 내가 지독하게 나빴으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나쁜 짓이라곤 전화를 받지 않고 메세지를 씹는 것 따위였다. 이게 착해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지만 이건 착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였다. 겁이 많아서 할 수 없던 것들은 많았다 싸울 때 백번 내가 사과를 해야할 순간에 되려 뻔뻔하게 굴기 라던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기… 그러면 이것은 대체 뭐에 대한 겁이었을까. 그는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것도 아니고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뒤에 무시무시한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먹었던 겁은 지금 이 관계가 깨지면 어떡하지 에서 출발하는 현상유지실패에 대한 것이었다. 좋건 싫건 나는 이 상태가 그렇게 크게 불만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했다. 치명적인 약점이고 모든 패배의 요인이다. 내가 훨..
정국은 지민이 사준 캔커피를 잡고 손끝으로 괜히 미지근해진 캔의 외벽을 긁었다. 정적을 견딜 수 없어 발에 채일 것도 없는 깨끗한 아스팔트 바닥을 신발코로 쓸었다. 지민은 그런 정국의 행동을 지켜보다 제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마저 소리나도록 들이켰다. 머리 위의 가로등은 교체하지 않아 아직도 노란 카드뮴 조명이었다. 지민은 가만히, 그러나 부산스럽게 다른 짓을 찾느라 노력하는 정국의 머리를 쳐다본다. 원래도 그렇게 까맣지 않던 머리카락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기운없이 축 가라앉은 그 앞머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국아 나는 … 한참만에 들린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든다. 쥐고 있는 캔커피는 아직 반이나 남은 채로 손 안에서 찰랑거렸다. 제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입술을 쳐다보며 한글자 한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