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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efii 2016. 10. 21. 19:32

하루가 길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반 분위기도 뒤숭숭할 시기라 일부러 독서실까지 간 탓에 돈이 아까워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더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독서실은 2시쯤엔 문을 닫는 곳이라 정국은 꼼짝없이 돌아가야 했다. 물론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진 않았지만 지난 한달 전부터는 집이 불편했고 가고싶지 않았다. 이게 다 새로 들어온 식구때문이다.
한달 전 정국의 엄마는 새로운 짝을 데리고 왔고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과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젊고 어린 남자였다. 새아버지가 될 사람이라며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정국은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뭘 바라고 우리 엄마랑 결혼해요? 그 말에 그 남자는 무슨 대답을 했더라, 어릴 때부터 가족이 없어서 다정하고 포근한 엄마가 좋다고 그랬던 것 같다. 그 순진한 대답에 정국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고 눈을 마주했을 땐 헛웃음이 났다. 아닌 것 같은데, 거짓말 같은데. 하지만 자신이 이미 반대할 사이가 아니었고 식을 올리진 않았지만 그 둘과 나는 자연스럽게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벌써 한달 전의 일이다.
그래서 집에 가도 쉴 틈 없이 온통 낯설음 뿐이었다. 크게 낯을 가리진 않지만 분명 새아버지란 사람은 경계해서 손해볼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가끔 집에서 마주칠 때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고, 꼭 그렇게 밥을 먹는 날은 밤에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이렇게까지 몸으로 나타나는 적은 처음이라 집에서는 걱정을 요란스럽게 했지만 그 때마다 정국은 그냥 시험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라고 둘러댔다. 어떻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까, 새로 들여온 이방인때문에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다고. 먹는 족족 체할 것 같다고. 혹여 말한다고 할지라도 누가 되물으면 할 말도 없다. 그에 대한 반감은 그냥 저도모르게 피어오른 것이기 때문에, 열에 아홉은 착해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웃음도 영 불편했고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사랑의 이유로 지나치게 모범답안을 내놓은 것도 맘에들지 않았다. 이유없는 적대심은 끊임없이 의심을 낳고 불친절함으로 이어졌다.

정국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침의 식탁을 떠올렸다. 다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건지 궁금했던 순간.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도 아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당연히 저를 뺀 두명은 자고있을 것이다. 신발을 조심스레 벗은 후 방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간 제대로 먹은 것 없이 온통 신경을 억지로 우회시키느라 체력이 바닥이었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이라고 되뇌이며 정국은 결국 가장 저와 가까이 놓여진 소파로 몸을 뉘였다. 센서등도 꺼지고 거실에 놓인 시계 초침소리만 거실에 울렸다. 지나친 고요 속에서 아무생각 없이 천장만 바라보는 정국의 비어버린 귀로 맥박이 뛰는 소리와 이명 따위가 맴돌았다. 그러다 시선의 왼편에 걸린 방의 문틈이 살짝 벌어졌다. 틈은 점점 크게 벌어지더니 인영이 하나 드러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형체를 금방 알아보았다. 지민이었다.
어떻게 일어난거지? 머릿속으로 어떻게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어느새 그가 정국에게 다가왔다. 집에 들어올 때 엄마와 함께 산 잠옷을 입고, 잠이 덜 깼는지 조금 부은 눈을 비비던 지민이 말을 걸었다. 지금온거야? 하며 묻는 지민에 정국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네 이제 들어가려고요.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지민이 소파의 끝에 걸터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 애매하게 길이 막힌 정국이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에 얼굴이 다가왔다. 등받이와 몸의 좁은 틈 사이로 팔을 뻗어 정국을 가둔 모양새가 된 지민이 가까이 마주한 얼굴을 천천히 비틀고 잔뜩 굳어버린 정국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대었다.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다물어버린 정국의 아랫입술 틈으로 지민의 남은 손이 파고들었다. 살짝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벌린다. 지민의 혀가 별다른 반항없이 벌어진 정국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 원래 모든 아빠들이 아들한테 이렇게 대해요?
- 아니
- 그럼 저한테는 왜 그래요?
- 글쎄...

갑작스러운 키스 이후 저에게 묻는 정국에게 대답한 지민이 정국의 뺨을 두어번 가볍게 두드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사랑해서 그렇겠지?

들어가서 자, 피곤하겠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안방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정국이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어냈어야하는데. 자책도 잠시, 정국은 이제서야 지금까지 이어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경계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마주했던 눈이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사랑한다고 말하며 감정에 젖어드는 눈이 엄마가 아닌 정국을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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