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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efii 2016. 10. 5. 04:03

모질게 굴어도 옆에 남아있는 사람의 마음은 뭘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국은 물었다. 이렇게 좆같이 굴어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지민은 앞만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 그런 소릴 해.

 둘 다 만날 만큼 만나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험난한 연애 짧고 달았던 연애 그리고 서로를 만났을 때 또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이 사람 괜찮겠지, 라는 희망으로 시작했을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된건-오로지 정국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형이 나를 더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이건 서로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더 받는 것은 과분하다. 이건 정국이 자신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더 받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선을 어긴건 지민이니까, 정국은 빨리 다시 지민이 제 금 안으로 돌아가길 바라면서 그를 괴롭히기로 했다. 하지만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정떨어진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했던 일들은 정도 조절이 어려웠다. 애시당초 감정을 조율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채 세운 오만한 방법이었다.
 정국은 지민이 전화를 걸었을 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지민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거나 받아서 둘러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아 실수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아무도 아냐 그냥 맨날, 나 귀찮게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전화는 지민이 먼저 끊은 유일한 전화가 되었다.


지민과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정국은 잔뜩 술을 마셨다.

 비는 왜 이렇게 내릴까. 우산을 사려고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었지만 지폐 한 장도 없었다. 다행히 카드는 있어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간 정국은 우산을 찾았다. 하지만 시간은 늦었고 그날의 비는 그 누구의 계산에도 없었던 비였기에 작은 편의점에서 팔던 우산은 동이난지 오래였다. 세상에서 젖는 것이 제일 싫다. 하지만 부를 사람도 부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있었으나 이제는 없고 사실 부를 수 있었어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정국은 그 비를 다 맞았다. 빈 손으로 문을 여는 그의 뒤로 아르바이트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처음보다는 많이 잦아든 비는 맞아도 따갑지는 않을 수준이었기에 손을 내밀어 정도를 가늠하고 주저없이 발을 내딛는다. 머리카락부터 젖어들고 속눈썹의 위로 시야를 방해하며 맺히는 빗방울에 눈가를 문지른다. 그래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났다.

 못된 짓을 하고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속 한 구석에 계속 신경써야하는 짐더미를 두는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면서 정작 모질지 못하니, 그동안 해왔던 적당히 미운짓 조차 버거웠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한심하고 나쁜놈이 아닐 수 없다. 좋아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빌미로 그것이 신기해서 이것저것 시험해봤다. 감히 자신이 뭐라고. 뒤늦게야 두려움이 드러난다. 그동안 비뚤어진 마음은 사실 자신에게 언제나 쏟아지던 애정이 사리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말 끝이면 어떡하지, 이야기의 다음이 생각나지 않아 정국은 결국 멈춰서 주저앉았다.


 감기에 걸렸다. 비를 맞으며 걸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뺨으로 짓누르고 잔 손이 뜨겁다. 후, 작게 숨을 불어보는데 입 속도 뜨거웠다. 잠에서 깬 지금은 새벽이었고 휴대폰을 잡으려 뻗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겨우 집어들어 습관적으로 번호를 누른다. 늦은 시간이었으니 받지 않는 것이 당연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손가락이 다시 한번 기록에 남은 이름을 눌렀다. 잠과 열에 취해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을 반복하다 여보세요, 하고 넘어오는 잠긴 지민에 목소리에 정국이 눈을 반짝 떴다.
 내가 지금 뭘 한거지? 스스로를 자책할 새도 없이 지민이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낮에 헤어진 사이 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말투로 저에게 묻는다. 정국은 어제 있었던 일은 다 꿈이었나, 멍한 자신의 기억을 짜맞추며 지민과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대답했다. 감기인 것 같아요. 왜? 비를 좀 맞아서요.

 택시를 타면 되지 않았냐고 하는 지민의 물음엔 답할 말이 없었다. 간단한 방법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멍청한 상태도 아니었고 정국에겐 택시가 중요하지 않았다. 대화 속에 이전처럼 자신에게 전화하지 그랬냐고 말하는 지민이 없다. 낮에 있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실감한 순간 조금이나마 기대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번호를 누른 자신의 손가락이 원망스럽다. 정국이 열에 멈춰버린 머리를 겨우 굴리며 뭐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지민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렇게 전화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
[나 보기도 싫다며]

 누구에게나 마지막 대화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문제는 뱉은 사람에겐 그렇게 크게 의미 없던 말이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정국은 지민과 헤어지면서 얼굴도 보기 싫다는 소리를 했다. 단순히 오기로 한 말이었다. 어떻게 먼저 헤어지자는 소리를 할 수 있지. 저도 모르게 관계에서 목줄을 쥐고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매달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던진 말이 지민에겐 큰 상처가 된 것이다.

"…"
[먼저 끊을게]
"…싫어하는게 아니고, 형"

 기어코 빗속에서 걸어오면서 깨달은 제 속을 말하고 만다

"형을 좋아하는게 무서워서요"
[…]
"내가 더 좋아하는게 무서워서…"
[…]

 정국이 말을 끝내자마자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까지의 감정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던 진심을 보여주었을 때 지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혹여 그것이 거절당한다 해도 화를 낼 순 없기에 정국은 눈을 가렸다. 초라하고 적나라한 말이었다.

[… 지금 갈게]
"…"
[니가 싫다고 해도 갈거야]

 한참 정적이 흐르다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겠다는 그의 말에 정국이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들리지 않는 대답을 어떻게 들었는지 통화가 끊겼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듯 정국이 모로 누워있던 등을 침대에 제대로 눕혔다. 만나면 아마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똑똑한 척 감정을 세던 예전과는 다르게 혼자서 그어놨던 선을 지우고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정국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지민의 얼굴을 보며 생각은 그 때부터 하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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