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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efii 2016. 9. 25. 01:39

 정국이 지민의 집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것 중 지민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목욕용품이 가득한 바스켓이었다. 다양한 향의 바디워시와 로션 그리고 여성용인듯한 화려한 디자인의 바디미스트 등이 그 안을 채웠다. 그 땐 단순히 씻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항상 정국을 만나면 좋은 향이 났던 것을 떠올리며 바스켓의 워시들에서 향을 상상하고 장면을 생각한다. 지민에게 그것들은 그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지민이 정국과 크게 다투는 일이 있었을 때, 심지어 나중에 그것이 지민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던 날에 정국은 지민과 크게 말다툼을 하다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집에 작게 욕을 하고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거실엔 물소리와 시계초침 소리만 울렸다.

 문득 지민이 시계를 쳐다보았을 때 시간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국이 화장실에 들어간지 한시간이 넘었었고 지민은 내심 걱정이 되었으나 문을 두드릴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손놓고 정국의 생각을 반, 다투었던 일을 반 떠올리다 어느새 섞여버리고 지민은 정국이 나오는 때를 기다렸다. 살짝 가물한 눈가를 문지르다 달칵이며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이 정국에게 다가갔다. 발갛게 익은 얼굴에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온통 불어버린 손 끝이 정국이 오랫동안 물 속에 잠겨있었음을 말해주었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정국의 손을 잡고 쪼글쪼글해진 손을 보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해 정국아. 내가 미안해. 정국이 제 손을 쥐고 손바닥에 말을 토해내는 지민을 보다 작게 대답했다. 나도 미안해요. 다툼은 그렇게 끝나고 다행히 오해는 풀렸지만 지민은 정국이 그 날 화장실에서 욕조에 앉아 생각한 내용은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민이 몇시간동안의 목욕이 정국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는데, 그렇기에 지민은 그 몇시간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그 시간은 그대로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에 앞으로 부디 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언젠가 또 정국이 욕실로 들어간다면 지민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문을 두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그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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