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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지정

Kyefii 2016. 9. 25. 01:37

 지민은 바에 앉아 글라스의 테두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여자는 지민의 행동이 거슬리는듯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머리아파요, 그만해요. 그러자 지민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 너무 지루해서요. 그 말에 여자가 지민을 향해 몸을 틀고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여자는 미인이었으므로 슬쩍 미소지으며 말을 걸면 이 귀여운 동양인 남자가 분명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보는 얼굴이네요"
"처음 왔으니까요"
"혼자 온거에요?"
"성격이 안좋아서요"

 지민에게 여자의 호감을 사는건 어렵지 않았다. 워낙 지민과 웃고 말 몇마디를 나누면 누구든지 더 대화를 하고싶어 안달이었기에, 애인을 수십명씩 갈아치우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는 지민을 낚아보려 시작한 대화였겠지만 마지막엔 되려 자신이 말리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술 조금, 대화 조금에 무척이나 친해진 듯 지민의 뺨에 살짝 입맞추며 그녀가 속삭였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줘요. 여자는 지민을 잠깐 세워두고 리셉션데스크로 걸어갔다. 지민은 예의 눈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떨어져 있는 동안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확인한 지민이 휴대폰을 꺼내 메세지를 입력했다. 20m. 다른 말 없이 짧게 숫자만 전송한 후 손목의 시계를 한번 만지작거렸다. 얇지 않은 손목을 감싼 시계 테두리의 어디쯤에 존재하는 미세한 실금이 그의 손톱에 걸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여자는 방 하나를 잡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준비를 마친 지민이 호텔의 입구를 둘러보았다. 주말 중 꽤 늦은 시간이지만 휴양지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홀을 돌아다녔다. 벨보이 또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중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전정국?"

 입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익숙한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지민이 짐을 들고 몸을 돌려 제쪽으로 걸어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톤의 유니폼을 입고 양 손에 짐을 든 남자의 얼굴은 분명 정국이 맞았다. 저도 모르게 니가 왜 여기에 있어?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살짝 당황한 눈빛과 이내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회피하는 정국의 태도였다. 지민은 예상에 없던 일에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일이 꼬이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괜찮아요?"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급히 안색을 바꾼 지민이 웃어보이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지민이 답지않게 중얼거리며 투정부리는 척을 했다. 오래 떨어져있어서 그런가. 고작 10분인데? 지민의 속도 모르고 여자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어보이며 제 허리를 감싸쥔 지민의 손에 제 손을 얹기 전 키를 흔들어보였다. 올라가요 우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층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지민은 여자에게 키스했다. 정말로 제 마음이 동할 땐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수작'을 부려야하는 상황이었기에 매너있는 척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쁘진 않았는지 맞댄 입술 사이로 여자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러나 갑자기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줄이며 한 층에서 멈췄다. 입술이 번들대도록 장난을 치던 여자와 지민이 열리는 문을 쳐다보았다. 갈라지는 틈 사이로 파란 색의 모자, 앳된 얼굴 그리고 유니폼. 보통의 직원이라면 딱 봐도 섹스텐션으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그 직원이 정국이라는 것에 있다.
 정국은 인상을 찌푸리며 엘리베이터에 타는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닫힘 버튼을 누른 채 뒤돌아섰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가속을 내며 올라갔다 지민의 품 속에 여자가 투덜거렸다. 눈치없는 직원이네. 지민은 말없이 여자의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랬지만 온통 신경은 정국의 뒷모습에 꽂혀있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여자가 지민의 손을 이끌었다. 적극적인 여자네, 지민이 천천히 따라 걸어나가며 몰래 뒤를 돌아봤다. 냉랭한 표정의 정국과 눈이 마주치자 지민은 다시 머릿속이 온통 꼬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엘리베이터와 멀어지며 여자가 다시 안겨오는동안 지민은 애써 정국을 잊으려 노력했다. 일단 지금은 당장의 일이 중요했기때문이다. 정국에 대한 일은 천천히 해결해도 괜찮았다. 사실 단언할 수는 없으나 괜찮아야했다.
 여자가 방의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지민이 넓은 객실에 작게 감탄했다. 과연 이 구역 내 제일 큰 마약 조직 보스의 애인이라더니 돈을 쓰는 스케일이 달랐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방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여자가 무언가를 쥔 채 객실에 들어온 지민을 겨눴다. 작은 나이프였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던 지민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뭐하는거에요?"
"내가 요원도 못알아볼줄알아?"
"…무슨소리에요"

 입꼬리를 겨우 올리며 대답하는 지민을 향해 여자가 대답 대신 칼을 휘둘렀다. 어설프게 쥔 손을 보니 제대로 다루지는 못하는 듯 했다. 나름대로 위협을 주려 했던 것 같았으나 가볍게 피한 지민이 한번에 그녀를 제압했다. 여자의 손에서 떨어진 나이프가 바닥에 수직으로 박혔다. 발 끝으로 칼을 차며 여자의 목을 움켜쥔 지민이 바 테이블로 끌고가 그 위로 거칠게 얼굴을 처박았다. 충격에 여자가 비틀대는 틈을 타 뒤로한 양 손을 시계 테두리 사이에 숨겨둔 케이블로 결박하는 것으로 시시한 싸움을 마무리했다. 더이상 매너있고 느물거리는 사람인 척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귀찮은듯 아무렇게나 소파에 여자를 던진 지민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다음 거래 장소 알지? 말해"

 나름의 의리는 있는지 내가 말해줄 것 같냐며 쏘아붙이는 여자의 말에 지민이 짜증난듯 소파 밖으로 나온 그녀의 발목을 세게 밟았다. 굽이 높았던 탓에 위태롭게 버티던 얇은 뼈가 부러지자 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마저 밟아줘? 그러자 빠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장소를 이야기 했다. 휴대폰을 꺼내 메세지로 여자에게 들은 접견지를 보낸 지민이 한숨을 쉬고 시계를 확인했다. 자신만만하게 보낸 시간보다 5분이나 초과되어있었다. 자존심 상하네. 그러나 지민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 구겨진 자켓을 툭툭 털며 나가려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간간히 신음소리가 울리는 복도가 아닌 덩치 큰 정장의 사내들이었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지민이 욕을 내뱉었다. …씨발. 어렵진 않지만 일이 귀찮게 굴러간다.

 조직원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아무리 실력좋은 지민이라 해도 밤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술까지 마신 몸 상태가 최상일리 없었다. 슬슬 힘에 부쳐 맞는 횟수가 늘어갔다. 그러다 제 뒤로 무거운 엔틱 의자를 휘두르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진 지민의 위로 남자가 올라 타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몸이 기울어졌다. 뭔가 맞은 듯 등가로 손을 가져다 대며 쓰러진 뒤로 보인 것은 정국이었다. 정국아! 지민이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니 정국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부르니까 시선이 나한테 다 집중되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렇네. 정국에게 시선이 몰린 틈에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이 남자들의 목을 꺾고 장식용 꽃병을 던지고 허벅지에 파편을 찔러 박았다. 슬슬 끝이 보이는 듯 했다.

 마지막 한 명의 복부를 걷어 차며 숨을 몰아쉬는 지민의 옆으로 정국이 걸어왔다. 잔뜩 화가난 표정인 정국의 얼굴엔 자잘하게 얻어맞은 상처로, 이마엔 머리카락이 피와 함께 엉겨있었다. 다가온 정국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출장간다면서요. 그 말에 지민이 고개를 들고 정국을 한참 쳐다보다 무언가 떠오른듯 눈썹 한쪽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넌 엠티있다며.

"요즘 엠티는 해외로도 가나봐"
"출장 일정중에 여자 꼬시기도 있나봐요"
"엠티에서 코스프레도 시키던가? 나땐 안그랬던 것 같은데"

 그 말에 할말이 없는지 정국이 단추가 다 떨어져 너덜너덜해진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괜히 바닥에 엎어진 채 기절한 남자를 걷어찼다. …돌아가서 마저 얘기 해요. …그래. 상처만 남은 대화를 끝으로 정국이 먼저 방을 나가고 지민이 나오며 키를 챙긴 후 문을 닫았다. 다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스위트룸에서 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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