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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지정

Kyefii 2016. 11. 2. 02:14

 정국은 지민이 사준 캔커피를 잡고 손끝으로 괜히 미지근해진 캔의 외벽을 긁었다. 정적을 견딜 수 없어 발에 채일 것도 없는 깨끗한 아스팔트 바닥을 신발코로 쓸었다. 지민은 그런 정국의 행동을 지켜보다 제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마저 소리나도록 들이켰다. 머리 위의 가로등은 교체하지 않아 아직도 노란 카드뮴 조명이었다. 지민은 가만히, 그러나 부산스럽게 다른 짓을 찾느라 노력하는 정국의 머리를 쳐다본다. 원래도 그렇게 까맣지 않던 머리카락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기운없이 축 가라앉은 그 앞머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국아 나는 … 한참만에 들린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든다. 쥐고 있는 캔커피는 아직 반이나 남은 채로 손 안에서 찰랑거렸다. 제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입술을 쳐다보며 한글자 한글자 속으로 따라 말해본다. 정국아 나는 …

 그리고 알람이 울렸다. 정국이 사납게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휘적이며 시끄럽게 울려대는 휴대폰을 찾는다. 휘적이는 손에 걸리는 차가운 기계를 잡아 마구잡이로 터치해 알람을 끄곤 한숨을 쉬었다. 재수없게도 어젯밤의 일을 그대로 재연하는 꿈을 꾼 정국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은 잠이 덜 깨 뻑뻑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씻고 나오니 식탁엔 미역국이 떡하니 놓여있었다. 정국은 제 몫의 미역국을 퍼오는 엄마에게 괜히 투덜댔다. 나 오늘 시험인데. 퉁퉁 불은 입으로 중얼거리니 전혀 몰랐다는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미신을 믿었다구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정국은 어제 이후로 미신을 믿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배는 고프니 자리에 앉아서 국을 뜨는데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몇숟갈을 먹던 정국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반쯤 꺾어신은 후 현관문을 열었다. 뒤에서는 시험 잘 보라는 말이 들렸지만 웃으며 대답할 기분이 아니라 대신 손을 휘적였다. 부엌에 있는 엄마가 그것을 봤을까 싶지만 알 수 없다.
 정국은 복도를 걸었다. 맨 끝 복도에 있는 집에 사는 정국은 매번 이렇게 등교하는 길에 지민과 마주치곤 했다. 지민은 반대편 복도의 맨 끝 집에서 살았으므로 어쩌다 시간대가 맞으면 같이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맞지 않는 날인 듯 했다. 괜히 천천히 걸어보기도 하고 자리에 멈춰서 십초씩은 기다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국은 이짓을 세번씩 한 후에야 원래의 걸음걸이 속도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는 오늘따라 올라오는 속도도 느리고 내려가는 속도도 느렸다.

 이 동네의 애들은 대부분 같은 중학교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등교길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지금 같은 반이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스쳐 지나갔던 얼굴들이 섞여있다. 정국은 그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지민의 얼굴 아니면 뒷통수쯤을 찾았다. 티나지 않도록 눈을 굴려 그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짧은 거리의 등교길 한가득인 남자애들 속에서 지민은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지 못하면 이렇게 가는 길에라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조차도 볼 수 없는 지민의 흔적에서 정국은 지민이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계단을 올라가 습관처럼 복도의 코너를 돌고 반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정국이 가방을 열었다. 아무리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을지라도 시험은 시험이었고 제 기분에 따라 돌아갈 세상이 아님을 아는 정국은 하기 싫었지만 가방에서 단어장을 찾아 꺼내들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의미 없이 눈으로 글씨를 훑어내리다 결국 덮은 순간 종이 울렸다.


 오늘은 시험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래서 마지막 교시 쯤엔 그 누구도 시험에 집중하지 않았다. 와글거리는 교실 속에서 정국은 가만히 시험지만 쳐다봤다. 조금 불편한 제 발끝에 달린 발가락을 괜히 꼼질거려보다 책상위로 엎드렸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꿈을 꾼 탓에 잠을 설쳐 조금 비몽사몽하던 참이었다. 눈을 감고 속으로 노래나 흥얼거리는데 문득 지민이 떠오른다. 흥얼거리던 노래는 지민이 추천해준 노래였다. 결국 애써 다른 것에 집중을 하고 노래를 불러도 지민으로 돌아오는 고리 속에서 정국은 괴로워졌다. 싫은 와중에도 자동적으로 지민과 붙어다니던 며칠 전을 떠올린다. 그러고보면 왜 아침에 지민이 없었는가 의문이 들었다. 정국은 어제 전 까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가는 길 오는 길마다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따라붙어서는 부축해주던 지민이 발걸음을 끊은 것이 신기하면서도 서러웠고 제 고백이 그렇게나 충격받을 일이었는가싶어 우울해졌다.

 마치는 종소리가 반 천장에서 스피커를 통해 쏟아지고 맨 뒷자리에 앉은 애가 일어나 시험지를 걷어가는 것으로 시험이 끝났다. 수거해갔던 휴대편을 돌려받고 종례까지 마친 후 메신저를 킨 정국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지민에게 메세지가 왔기 때문이다. 집에 갈 때는 꼭 같이 가자며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마음같아서는 지민을 피해 집에 훌쩍 가버리고싶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국은 불편할 것이 뻔한데도 먼저 가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침엔 신발의 뒷꿈치조차 볼 수 없었던 지민이 이번엔 같이 가자고 메세지를 보내오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싶어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쾅대려는 것을 겨우 진정시킨 정국이 곰곰히 지민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하다 자리에 엎드렸다. 해봤자 실망만 낳을 것 같았기때문이었다.

 텅 빈 교실에서 정국은 괜히 손톱 끝을 건드렸다. 창가에 놓인 말라비틀어진 화분들을 쳐다보다 휴대폰 게임을 하는 중에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냉큼 끄고는 자는척 아까와 같이 엎드렸다. 자신의 반 앞에서 멈춘 발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 정국은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지민이 자신에게 다가오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국은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정국의 등으로 지민의 손이 올라왔다. 지민은 누가봐도 자는 것처럼 보이는 정국을 흔들어 깨울까 하다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정국아, 일어나.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 지민은 그제서야 정국을 가볍게 흔들었다. 집에 가야지. 그 말에 정국은 애써 잠들었던 척하며 부러 졸린 눈을 하고 지민을 쳐다봤다. 별로 보고싶지 않았던 지민의 얼굴을 마주하자니 속이 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마음상한 티는 모두 감추지 못한 상태로 대꾸했다.

"…갈거에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자연스럽게 정국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정국이 지민이 가져가는 자신의 가방끈을 붙잡았다. 지민은 꼭 자신이 뺏어가려던 꼴이 된 것 같아 당황스러운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왜? 물었지만 정국은 대답없이 제쪽으로 끈을 잡아당길 뿐이다. 지민은 결국 들어주려던 가방을 정국에게 돌려주어야했다. 고집스럽게 사수한 가방은 무겁지 않았다. 정국은 들은 것 없어 홀쭉한 가방을 매면서 무겁지도 않은데 굳이 들어주려던 지민의 행동을 떠올렸다. 옆에서 가만히 자신을 기다리는 지민을 한번 쳐다본 정국이 말없이 그를 지나쳐 교실을 빠져나갔다. 지민은 절뚝이며 걸어가는 정국을 앞서지도 않고 나란히 걷지도 않았다. 한걸음 떨어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지민의 도움 없이 복도를 걸어가던 정국이 멈춰섰다. 계단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올라올 땐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내려가는 것이 문제였다. 난간을 붙잡고 하나씩 내려가다 제 옆으로 다가온 지민의 인기척을 느낀 정국이 걸음을 멈췄다. 지민이 난간을 붙잡고있던 정국의 팔을 끌어다 제 어깨에 걸친 후 남은 팔을 정국의 허리에 감았다. 꼼짝없이 밀착한 상태가 된 정국이 당황스러움에 멈칫했지만 이내 빠져나가려는듯 몸을 비틀었다. 아무리 제 도움이 불편했어도 그렇지 위험한 상황에서 제 도움은 죽어도 받기 싫어하는 정국이 답답했던 지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고집부리지마"
"…"
"너 그러다 또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나름 참으려고 했지만 말투에 담긴 짜증을 느꼈는지 정국이 천천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순순히 몸을 맡기고 한걸음 씩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지민은 정국의 얼굴을 살피면서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제 한마디에 풀이 죽어 입을 꽉 다물고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 정국의 옆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수가 없다. 계단은 왜이렇게 많은 것인지, 끝이 없어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며 지민은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지만 바로 옆에서 숨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운 정국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어려웠다. 불가능했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계단을 내려와 현관으로 걸어갔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색했던 주제에 익숙해져 여전히 부축한 상태라는 것을 먼저 의식한 정국이 지민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풀리는 손이 또 새삼 섭섭해 정국은 잠시 지민에게 잡혀있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자국난 손목엔 미미하게나마 온기가 남아있었다. 정국은 황당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는 지민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반대편 벽에 몸을 기댔다.
 정국이 슬금슬금 멀어진 지도 몰랐던 지민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생각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른 지민이 정국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정국은 바로 제 옆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벽에 붙어있었다. 지민은 앞만 보고 있는 정국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다물어야했다. 할 말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작게 소리나도록 유리문에 머리를 대고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지민은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방금 전의 시간을 생각했다.

 둘은 조금 거리를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지민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울리는 벨소리에 당황한 지민이 버벅이며 전화를 받았다. 교내에 진입할 수 없으니 교문까지 걸어나오라는 택시기사의 말에 지민은 다친 정국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쳐다보고 조용히 사정했지만 기사는 자신도 어쩔수 없다고만 말했다. 지민은 알겠다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짧게 끝날줄 알았던 통화가 길어지는 것이 이상해 지민을 쳐다보던 정국이 표정이 좋지 않은 지민을 보고는 물었다.

"뭐라고 그래요?"
"교문까지 나오래"

 지민의 말에 다시 밖을 쳐다보던 정국이 한숨을 쉬었다. 지민은 제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시험이라 특별히 챙겨온 것 없이 무겁지 않은 가방을 정국에게 내밀자 찌푸린 얼굴이 돌아왔다. 왜요? 너 업고 가려고. 지민의 말에 정국이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됐어요. 그러나 지민의 표정은 단호했고 물러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정국은 지민에게 업혀야했다. 건네준 가방을 자신의 가방 위로 매고 제 앞에 앉아서 업을 준비를 한 지민의 등을 내려다보면서 정국은 오늘따라 다친 다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수가 없었다.

 정국은 지민에게 업혀 이동하면서 맨날 보기만 했던 뒷모습이 생각보다 편하진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제 몸과 맞닿은 지민의 등에 도드라진 날개뼈가 계속해서 가슴께를 눌렀다. 불편함에 계속 그냥 내려와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덩치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면서 굳이 자신을 업고 가겠다며 등을 내밀던 지민이 떠올라 정국은 그냥 지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고있으니 시간도 공간도 감각이 둔해진다. 업혀있는 탓에 발붙이고 있을 땅 마저 없어서 무게를 상실한 채 남아있는 의식만이 부유했다.
 정국이 기껏 지민과 마주쳐 같이 시간을 공유하는 동안 한 것이라곤 투덜대는 것 뿐이었다. 투정부리고 시위하며 지민이 제 마음을 거절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느끼길 바랬다. 하지만 돌아온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저 조금 예민해진 정국의 기분을 눈치보는 지민이었다. 정국은 지민이 자신이 이렇게 하루종일 불친절했던 이유를 알고나 있을까 싶어 울적해졌다. 그러나 정국을 더 서럽게 만든 것은 지민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의식적으로 건너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국은 자신의 마음은 거절했으면서 오늘도 다정하게 저를 챙기는 지민이 미웠다. 어쩌다 저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하며 한탄도 했지만 정국은 여전히 지민이 좋았고 지민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행동을 후회하였으며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기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랬다. 


 정국의 감정이 한참을 돌아간 끝에 억울함에 도달했다. 밉지만 좋고 사랑하고 사랑해줬으면 좋겠는데 가망없는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절대로 울고 싶지 않았고 고백이 까인 날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적어도 지민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눈물인데 지금은 무려 지민의 등 위에서 울고있었다. 하필이면 예고없이 내린 비 탓에 차갑게 식은 몸이 본능적으로 지민의 체온에 의존하면서 따뜻하기는 또 왜이렇게 따뜻한가싶어 더 눈물이 났다. 정국은 지민의 '온기'를 사랑했다.
 움직이던 것이 멈추고 지민이 정국의 이름을 불렀다. 정국은 고개를 들고 팔을 푸는 지민에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혹시나 눈물자국이 있을까 싶어 괜히 눈가를 긁는 척 손끝으로 눈꼬리를 훑은 정국이 매고있던 지민의 가방을 건넸다. 지민이 정국이 내미는 가방을 받으며 망설이다 빠르게 말을 내뱉고 차에 올라탔다.

"…울지마 정국아"

 다 알고 있으면서. 정국은 지민의 말에 문고리만 쥔 채 그것을 잡아당기려는 모습 그대로 멈춰섰다. 젖은 머리카락 끝으로 맺히는 빗방울이 턱을 타고 마지막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쫓으며 결국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국은 제 사랑이 완벽하게 떠내려 가는 것을 느꼈다.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아 충분히 붙잡을 수 있었지만 그 흐름에 도달할 수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습을 정국 혼자만이 아닌 지민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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