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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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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efii 2016. 10. 28. 16:57

 지민의 관심이 끊긴건 일주일 전 부터였다. 평소에는 복도 저 끝에서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상태에서도 달려와서는 반갑다고 등을 때려대던게 엊그제같은데 요즘은 마주치기도 어렵고 마주쳐도 어색하게 웃는게 다였다.
 징글징글했던 관심이 끊기다보니 생각보다 하루가 허전했다. 달라붙는 것을 귀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밀어내거나 장난쳐도 재미없다고 쪼는게 하루 중에 꼭 한번은 있었는데 사라지니 뭔가 자꾸 아쉬웠다. 몸에 밴 일과는 무서운 것이었다. 정국은 강의실을 나오며 건물의 끝을 쳐다봤다. 원래 이쯤 되면 내려올 때가 됐는데 계단에서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심 아쉬워하는 자신이 이상해서 정국은 괜히 카톡을 켰다. 몇일 전 과제를 물어보느라 보냈던 메세지에 공지를 복붙해서 보내온게 마지막이었다. 깜빡이는 창에 '형' 까지 쳤다가 급하게 백스페이스 를 터치한다. 부쩍 답장도 딱딱해져서 괜히 이유없이 먼저 메세지를 보내는 것 마저 어려워졌다. 이유가 없는건 아니지. 사실 물어볼 것도 있었고 이유는 충분했지만 자신 마저도 평소같지 않은 행동을 했다간 이 어색함의 간극이 답도 없어질 것 같아 포기해버렸다.
 아예 그동안 마주치질 않았으면 걱정이 된다는 핑계로 먼저 전화라도 했을텐데 가끔가다 좁은 캠퍼스에서 마주치니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니까 웃는건 왜 그렇게 웃냐고"

 꼭 수술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려서는 말투도 '어 안녕' '나 바빠서 가봐야겠다 밥 잘 먹고 수업 잘 들어 정국아'… 나쁘진 않았는데 자동응답기에 몇개 저장해두고 돌려쓰는 것 처럼 영혼이 없었다. 사이에 성의가 없어진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 생각이 이상한데까지 튄다. 진짜 어디 아픈건 아닐까. 하지만 정국은 상식적인 사람이므로 그런 행동들이 아프다고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대체 왜그러는거야. 성질을 부리며 계단을 내려가던 정국이 내려가는 속도를 천천히 낮추다가 아예 멈췄다. 바로 아래층의 계단 난간에 익숙한 인영 두개가 보였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가만 들어보니 둘 다 아는 사람이다. 지민과 태형이었다. 엿듣는 것은 취미가 없었지만 그동안 속터지는 일도 있었고 하여 정국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며 귀을 기울였다. 심각한 분위기에서 하는 대화치고 목소리가 컸다.

- 아 그냥 말을 해
- 뭐라고 말을 해…
- 내가 너 좋아한다! 이러면 되는거아냐
- 어떻게 그래…
- 와 다죽었네 박지민 예전엔 고백 뿌리고 다녀서 욕먹던게 엊그제같은ㄷ…
- 조용히 좀 말해 들으면 어쩌려고!
- 야 듣는거 걱정했으면 여기서 말을 하면 안되는거 아니냐
- 그건 그런데…

 일련의 대화에서 정국이 요약한 것은 딱 두가지였다. 지민이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 근데 아직 고백을 못했다는 것. 사랑에 빠져서 그랬던거였어?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이유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국의 귀가 서서히 빨개졌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한테 문제가 있나 고민했던 며칠-그래봐야 이틀이었다-이 미친듯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자신이 자의식 과잉인 사람이었나? 티를 잘 안내는 성격이었으니 망정이지 이리저리 물어보고 다녔더라면 흑역사로 보기좋게 적립되었을 것이다. 

 났던 성질이 더 나서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고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려던 찰나 정국은 내딛은 발을 다시 계단으로 붙여야 했다. 대화에서 갑자기 제 이름이 튀어나왔기때문이었다. 빠르게 제 주위에 있는 여자 동기들이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자괴감도 밀려왔다. 아니 친한 형 관심하나 못받았다고 질투하는 것 마냥 주위 사랑의 후보를 훑는게 말이나 되는지. 머릿 속이 혼돈파괴되는 사이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요즘 정국이한테 말은 하냐?
- 피하고 있지 뭐
- 하이고…

 박지민이, 어쩌다 전정국을 좋아해서는 이 고생이냐. 그 말에 엿듣던 정국의 눈이 번뜩 뜨였다. 나를 좋아한다고. 형이. 곰곰히 제가 헛것을 들은 것은 아닌지 리플레이를 하던 정국이 입으로 말을 중얼거리고 팔뚝도 한번 꼬집어 본 후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이유가 자신을 좋아해서였든 뭐든간에 어쨌든 이유는 자신때문이 맞았다. 안도감에 표정이 핀 정국이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갔다. 그런 정국과 마주친 지민과 태형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저도모르게 입에 손을 가져간 태형이 이내 손을 내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정국아. 안녕하세요 태형이형. 그 옆에선 지민이 웃지도 못하고 간신히 눈만 뜬 채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지민이형도 있었네"
"어 안녕… 오늘 여기서 수업있었나보다"
"네 근데 저 원래 여기서 듣는거 알잖아요"
"아 그랬지"
"저 그럼 갈게요 들어가세요"
"그래…"

 벙찐 둘에게 각별히 예의바르게 인사한 후 건물을 나가는 정국의 뒤로 나지막히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근데 쟤 묘하게 기분 좋아보이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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