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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지정

Kyefii 2016. 10. 17. 00:17

 그날 내가 실수하긴 했다. 술이 좀 취해있긴 했는데 형이 빨리 들어가라고 해서, 나는 그날따라 교수에게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들었고 조별과제엔 프리라이더가 뻔뻔히 단톡방을 나가고... 기분이 안좋아서 조금 과하게 투덜대며 대들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말았다.

"아 형 진짜 꼴도보기도 싫어요"

 그래서 형이 뭐라고 그랬더라. 아무말도 안하고 입을 다물고 한참 나를 쳐다보다 딱 그렇게 말했다. 알겠어. 그리고 손에 쥔 편의점 봉투를 나에게 건네주고 돌아가는데, 봉투 안에는 숙취해소 음료가 들어잇었고 형은 이미 두번째 가로등까지 걸어가버렸다. 정말로 길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봐도 내 잘못이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 싶었던건 그날 이후로 형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화가나고 내 얼굴이 보기 싫어도 그렇지 강의까지 빼먹는게 말이나 되는일인가. 심지어 형은 웬만해선 빠지지 않는, 겨우 2년 다닌 대학이지만 주위에서 그렇게 출석은 열정적일 수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단순히 애인이랑 싸웠다는 이유로 안온다는건 정말로 이상했다. 수업 내용은 이미 물건너가고 나는 심각하게 형이 삐진 수준을 가늠하다 추가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그 어떤 수업에서도 출석을 부를 때 형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수업 안나오는 것도 신경쓰여죽겠는데 아예 포기까지하냐. 그런데 학기가 절반이나 지나갔는데 관두는게 가능한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옆자리까지 들렸는지 보다못한 선배가 한마디 했다. 야 그냥 전화를 해.

 전화를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형이 그렇게 화난 모습도 처음이라 조금 겁이났다. 안받으면 쳐들어가야겠단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옆에서는 선배가 나를 구경하고있었다. 지민이 화난거 궁금하다. 나 화난거부터 먼저 볼래요? 아니. 수화음은 꽤 길게 늘어졌다. 그냥 끊을까 하는 순간 형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의외로 싸우기 전과 다를게 없다. 오히려 내가 뜸을 들였다. 정국아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지. 어... 그러게요. 멍청한 말만 나온다. 또 정적이 흐르고 나는 뭐라 말해야할지 머리카락 끝을 괜히 만지작댄다. 그러던 틈에 선배가 마이크에 대고 크게 말을 해버렸다. 야 정국이가 너랑 만나서 할 얘기 있대! 생각치도 못하게 일어난 일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요! 니가 하도 답답하게 구니까 내가 말한거아냐! 아 진짜... 내가 전화를 걸은 상태라는 것도 까먹고 선배를 응징하며 아수라장이 된 상황을 정리한건 형의 목소리였다.

[그러면 내일 세시에 학교 정문 앞에 카페에서 보자]
"...알았어요"

 나는 왠지모르게 풀이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막상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무슨 말을 해야할까. 사실 미안하다고 말하는건 어렵지 않았는데 전화를 걸 때 망설였던 것 처럼 나는 형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게 낯설고 두려웠다. 한번도 못봤던 얼굴이니까.


 어제 말한 내일이 되고 오늘이었다. 공강이라 늘어지게 잘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마음 구석탱이에서 계속 신경이 쓰였는지 몇번이고 잠을 뒤척였나보다. 화장실에서 본 얼굴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술병났을 때보다 어째 얼굴이 더 상한 것 같은지, 칫솔에 폼클렌저나 안 짜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준비를 한다.

 옷을 입고 약속한 장소에 나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30분이나 일찍 와서 커피를 시키고 창가만 계속 쳐다본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엔 아는 얼굴도 보이고 바쁘게 지나가는 교수도 보이고... 형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는 12에 가까워지고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58분, 아직 2분 남았으니까 지각은 아니지. 괜히 얼음이 반쯤 녹아 잔 밖으로 땀을 흘리는 잔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형은 오지 않았다. 이게 뭐지? 나는 이게 형 스타일의 복수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안해봤는데, 어쩌면 여태 숨겨왔던걸까 하는 의심도 들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까 고민하며 손에 쥔 휴대폰만 내려다보는데 옆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배였다. 큰 입이 더 과장스럽게 움직인다. 야 아직도 박지민 안왔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는?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입이 다물어지더니 표정이 또 한심한 것을 보는 것 처럼 찌그러진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뭔가 입력하더니 나에게 휴대폰을 흔들어보이고 사라졌다. 휴대폰이 울리고 선배의 메세지를 확인했다.

[너 휴대폰 그렇게 쓸거면 중고로 팔아라]

 아 진짜. 결국 옆에서 도움은 안되고 신경만 긁는 선배덕에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 하나 설정해놓지 않은 탓에 지겨운 통화음을 또 들어야했다. 예전에는 바로바로 받더니 요즘은 그렇지도 않았다. 자동응답기로 넘어갈 때 쯤 전화를 받는다. 지금도 그랬다. 소리샘 어쩌구 하는 말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하는 순간, 정국아. 하고 부른다. 나는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요?"
[너야말로 어디야?]
"나 카페죠"
[나돈데, 너 어디 카페야?]

 잔 받침으로 깔린 휴지에 새겨진 로고를 읽는다. ... 카페요. 형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거긴데. 황당한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 카페도 아니어서 안보일리가 없는데 형은 보이지 않았다.

"안보여요"
[나 여기 창가자리에 앉아있어, 우리 맨날 앉는자리]
"나도 거기에 앉아있었는데요?"
[뭔소리야 나 너 본적 없는데]
"나도 형 본적 없어요"
[너 오긴 왔어?]
"내가 그럼 거짓말하겠어요?"

 통화가 좋게 끝날 것 같진 않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똑같이 우리는 말을 하지 않다가 전화를 끊었다. 억울했다.


 처음만 어려웠지 그 뒤로 전화를 거는건 무섭지 않았다. 받을 때마다 늘 목소리는 똑같았기때문이다. 문제는 다시 약속을 잡고, 만나는걸 서너번을 더 했지만 처음 약속했던 날 처럼 만나지 못했다는거다.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는 루프문에 걸린 것 처럼 약속을 잡고,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찾지 못해 화가난 상태로 집에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아니 왜 대체 안보이는거야. 다섯번 째 약속을 잡으려던 날엔 결국 포기했다. 이번에도 또 같은 자리에서 서로 왔냐고 추궁하다 집에 돌아갈게 뻔했다. 사실 카페에서도 나를 이상한사람 취급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아르바이트생의 조금 변한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결국 포기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하필 오늘 수업이 형을 따라서 들어간 영역교양 강의였다. 과학엔 젬병인 내가 수강신청을 한건 딱 형때문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어 내용을 따라가는건 불가능에가까웠다. 칠판위로 숫자가 날아다니고 슬라이드쇼엔 새까맣고 약간 징그럽게 빽빽한 우주의 사진을 띄워져있다. 그나마 설명이라도 따라적을까 싶어 펜을 움직이는데 오늘 파트의 내용이 특이했다. 다중 우주, 겹쳐진 공간, 고양이, 끈이 뭐 어쩌라는건지... 노트위로 단어를 늘어놓다 문득 단어 하나에 꽂힌다. 구글에 평행우주를 검색하고 맨 위에 뜨는 위키피디아를 눌러보는데 역시나 알 수 없는소리만 해댄다. 차라리 블로그의 글들을 눌러보는게 낫겠다 싶어 아무거나 눌러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말도안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형의 전화는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는데 못볼 수가 없다.


 나는 이 믿기지 않는 현상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지만 문과를 나온 머리로 물리나 과학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전화번호를 다시 입력하고 이전처럼 통화버튼을 눌렀다. 매일같이 걸려오는 동기들에게 전화를 할 때와 같은 수화음이 들리고 그가 "여보세요" 라며 대답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그 어떤 차이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정국이야?]

 순간적으로 내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까먹고 형이 내 이름을 부른 순간 손에 쥔 휴대폰을 재차 의식한다. 형. 나는 대답하고 몇일간 우리가 매번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서로를 만나지못해 어색해진 사이인 것을 기억한다. 아 우리 아직 서로에게 조금 속상한 상태였지.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이유는 형과 내가 살고있는 우주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나는 문과라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봐도 모르는 이론들이 우리 사이에서 이간질한 것이라고 말하고싶었지만 말한다고 믿을리가 없다. 왜냐하면 형은 꽤 현실적인 구석이 있는 이과생이므로.

[왜 전화걸었어?]
"형 내 전화 받을 때 이상한 거 없어요? 막 내 목소리가 튄다던가"
[아니 그냥 똑같은데? 너 휴대폰 고장났어?]
"아뇨 고장은 안났는데..."

 나는 지금 나만 알아버린 이 사실을 어떻게 형에게 알려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같은 장소에서 정말로 형이 보이지 않는다는걸 보여줄 수만 있다면...

"형 영상통화 할 수 있어요?"
[지금?]
"네"
[어... 왜?]
"그러면 광장에서 만나요 농구골대 앞에 도착하면 영상통화 하기에요"
[... 알았어]

 형은 이상하다는듯 목소리에 잔뜩 의문을 담고있었지만 알았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교재를 사물함에 쑤셔넣고 광장으로 뛰었다. 지각하기 2분전에나 나올법한 속도로 광장에 도착해서 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화면이 버벅이다 형의 얼굴을 겨우 띄웠다. 안좋은 화질의 영화를 보는 것 처럼 얼굴이 죄다 깍두기였다. 여튼 나는 눈, 코, 입이 겨우 구분가는 형의 얼굴을 마주하며 농구골대 앞에 서서 말했다.

"형 여기 어디같아요?"
[광장아니야?]
"맞아요 형은 어디에요?"
[나도 광장인데 농구골대 앞]
"나도요"
[너 안보이는데...]
"내 뒤를 한번 보라니까요"

 나는 최대한 손을 길게 빼고 풍경을 담으려고 기를 썼다. 얼굴과 골대를 함께 담아 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 형이 확인하려는지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느라 내 화면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가 멀어졌다.

[...진짜네]
"진짜라니까요"
[근데 너 왜 안보여?]
"내생각에는요..."

 우리 서로 다른 우주에 있나봐요.
 뭐라고?
 형이랑 나랑 다른 우주에 있는 것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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