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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지정

Kyefii 2016. 10. 11. 01:24

 오늘도 잘 놀았어? 묻는 말에 잘도 웃으면서 대답한다. 응 재은이랑 놀았어 밥엔 당근 나와서 싫었어. 여느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여섯시면 끝나는 민정이의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안고 집까지 걸어오는 평화로운 저녁, 시월 초입의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코끝이 조금 시려운지 귓가에서 킁하는 소리가 난다. 추워? 아니 눈을 마주치고 이런저런 나중엔 기억도 나지 않을 질문들을 하다 다다른 대문 앞에서 그의 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구두코, 들린 것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정국아"

 지민이 돌아왔다. 양 손에는 커다란 짐가방 두개를 들고, 민정이를 한번 보더니 씩 웃는다. 안녕? 민정이는 그 웃음이 맘에 들지 않는지 정국의 어깨로 몸을 더 틀었다. 누구야? 작게 소곤거리며 묻기에 정국이 똑같이 목소리를 줄여 대답했다. 사기꾼이야 조심해야해

"왜왔어요?"
"누구야 그 애는?"
"…누나네 애에요"

 그 말에 민정이 파묻었던 고개를 팍 들고 정국에게 물었다. 나 아빠 애가 아니야? 그 말에 정국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둘을 본 지민이 불청객주제에 또 흠뻑 웃으며 대신 대답한다.

"아니야 너 정국이 딸 맞아"
"…"
"진짜 닮았다 너랑"

 민정이는 정말 누나의 아이가 맞다. 다만 누나가 사고로 죽은 뒤 모두가 아이를 데리고 가려하지 않았기에 정국이 맡아 키우기로 한 것이다. 친척들은 그런 민정에게 가족대신 돈을 주었다. 여튼 기구한 사연으로 민정이 저와 같이 산게 지민이 사라진 후 두어달 뒤부터였으니 지민이 민정을 알리 없었다. 아이도 지민도 서로 초면이다. 어색하게 삼자대면한 상황에서 대화가 끊겨 잠시 정적이 흐르는 중에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춥다"
"…"
"들어가게 해줄거지?"

 그러고 보니 차림새는 어디 더운 나라에라도 있었던 것인지, 지민은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저 큰 가방에 걸칠 것 하나 없나, 또 발을 들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마냥 곱게보이지 않다가도 오버스럽게 춥다는듯 팔뚝을 쓸어내리는 지민의 모습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 옷가지 중 아무거나 하나 쥐어주고 내보내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지.

 정국은 몇년만에 나타난 제 한심스러운 애인을 집에 들이려 하고있었다. 미련하게도.


 뻔뻔하게 집에 들어와서는 배고프다고 말하는 지민에 정국은 알수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부엌으로 갔다. 내가 왜이러고있지 계속되는 자책속에서도 그래도 우리는 나쁘게 끝난 편은 아니니까, 생각이 삐죽 튀어나온다. 정말로, 왜, 더 좋아해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예 여기서 눌러 살거에요?"
"응?"

 지민이 라면을 먹다 정국의 물음에 옆에 놓인 물을 마신 후 대답을 고르는 척 소리를 냈다. 음… 글쎄.

"사실 이제 갈 곳이 없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게 재수없어 말에 날을 세우게 된다.

"그러면 길바닥에서 죽었어야지 왜 여기로 와요"
"도박해봤어 여전히 여기 사나 하고"
"…"
"너야말로 왜 아직도 여기에 살아?"

 이사갈 수 있었잖아. 제 할말은 다 했다는 듯 지민이 다시 제 앞접시를 들었다. 여전히 라면도 잘끓이네. 얻어맞을 소리만 골라하기에 저 얄밉게 드러난 팔뚝을 때리려 손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하기가 망설여졌다. 예전처럼 장난을 치는 지민에게 핀잔을 주고 장난스럽게 때린다면 지민은 자연스럽게 다시 제 삶에 스며들 것이다. 돌아갈 것이다. 정국은 이젠 말없이 라면을 먹는 지민을 쳐다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나도 형이 돌아올까 해서요. 그리고 형도 여전히…

"…속도 좋네"

 남 속은 뒤집어놓고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지.


 멋대로 찾아와 가방을 풀고 정국의 방 구석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뒤로, 지민은 아침에 일찍 나갔다 저녁쯤에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가끔은 저도 모르는 사이 떨어진 라면을 사오기도 하고 빈 냉장고 가득 과일을 사오기도 했다. 그 사이 민정이와도 많이 친해져서 간식을 사와 정국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몰래 건네주는걸 들킨적도 있었다.

 말없이 사라졌다 말없이 돌아온 사람을 받아주는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지 않았지만 그런 지민을 받아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밤늦게 혼자 스탠드를 켜고 과제를 하다 뒤를 돌아 속편하게 자고있는 지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지민과 정국은 당연한 것 처럼 서로 사랑에 빠졌고 사랑했고 같이 살았다. 둘 다 돈은 없었으니 조금 많이 걸어야 하는 동네에 방을 구해서 함께 살다가, 지민은 숨기지는 않지만 드러내지도 않는 사람이었기에 그날도 평소처럼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일이 길어지나, 엄밀히 말하면 정국은 지민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굳이 묻지 않고 산 이유는 믿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지민은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좀 물어보고 살걸, 싶었다.

 희미한 빛이 지민의 흐트러진 머리칼까지만 번지고 뿌옇게 보이는 잠든 얼굴을 보며 정국은 내일은 물어볼까, 왜 그때 사라졌었느냐고, 생각하다가도 혼자 속앓이하고 그리워하며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되새기기로 했다. 질문은 이렇게 또 속에서 소각되었다.


 지민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정국도 그 생활에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꼭 선심쓰듯 방의 왼쪽 모서리정도는 줄 수 있어요 라고 말해야지 하며 집에 돌아왔을 땐 빈 집이 정국을 반겼다. 지민이 풀어놨던 가방도 없고 화장실에 새로 사둔 칫솔도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또 갔어…"

 어제 밤에 부스럭거리더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겠지, 미안하다면 그러지 않겠지 또 떠나지 않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바보같이 같은 일을 두번이나 당한 것에 분해 정국이 씩씩거리다 이내 겁이났다. 설마, 잠깐 나간 것이겠지 하다가도 그런데 왜 칫솔까지 사라져? 제가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생각하던 사람이었나 놀랍기까지 했다.

 또 믿은 제가 한심스럽고 이젠 정말로 지민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나려던 순간 방의 문이 열렸다. 드르륵 오래된 미닫이 문이 내는 소리가 그렇게 낯설수가 없다. 빠르게 뒤의 그림자를 확인하려 돌아봤을 때 지민의 얼굴을 본 순간 긴장이 풀려버렸다. 이른 시간이라 단 둘만이 남은 방에서 정국은 고개를 숙이고 울어버렸다. 지민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던 순간부터 젖은 눈이 안도감에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몸을 웅크리고 우는 정국에 당황스러웠는지 손에 쥐고있던 봉투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지민이 그를 끌어안았다. 무슨일이야?

"형때문이잖아요"
"나?"
"또 사라진줄 알았다고…"

 지민이 정국의 등을 도닥이다 그의 대답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눈 주위가 엉망이었다 코가 빨개져서는 훌쩍이기에 지민이 제 손으로 정국의 뺨을 닦아주었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도 꺼내서는 찔끔 흘린 코도 닦는다. 지민은 들썩이는 정국의 등이 가라앉을 때 까지 쓸어주다 그가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한달 전 대뜸 집 앞에 찾아와 정국이 일상에 적응하려던 어제와 오늘까지 한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미안해"
"…"
"이젠 정말로 어디 안가"
"…그럼 가방은 어디에 둔건데요"
"그거?"

 이번엔 그냥 넘길 수 없어 잠긴 목소리를 겨우 쥐어짜낸 정국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안에 들었던거 다 버리고 왔어. 생각치도 못한 대답에 정국이 울음을 그쳤다. 그걸 버려요? 많았잖아요. 다시 평소로 돌아온 정국의 말투에 지민이 이제야 맘이 놓인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이제 여기서 다시 사려고.

"그럼 칫솔은요?"
"너랑 똑같은 모양이 아니더라고 같은거로 사려고"
"똑같으면 구분이 어렵잖아요…"
"그런가, 그래도 너랑 똑같은 거 쓰고싶어"

 지민의 품 안에서 정국은 계속 물었다. 가방은 왜 버렸으며 칫솔은 왜 버렸고, 방금은 어디에 다녀온 것인지. 그리고 조금 더 진정이 된 후엔 오래된 것들도 물어보았다. 그 땐 어디에 갔는지, 왜 말하지 않았는지. 하고싶은 질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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