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On

지정

Kyefii 2017. 3. 16. 23:22

"…너 괜찮냐?"

태형이 물었다.

"아뇨."

 정국이 대답했다. 태형이 손가락으로 정국의 눈 밑을 쭉 그으며 걱정아닌 걱정을 했다. 잠은 좀 자? 아뇨. 정국은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옆에서 책상 위로 엎어지는 정국을 보며 태형은 조금 미안한 마음에 제 휴대폰의 녹음을 키고는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밤색 뒷통수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야 정국아 수업 걱정하지 말고 자.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고개도 들지 않고 휘젓던 정국의 손이 툭 떨어졌다. 웅얼거리던 소리가 멎고 등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지민이 집을 나간게 4일 전이었으니 정국이 잠을 설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평소에도 지민이 학교에서 밤을 새는 일은 잦았기 때문에 혼자 자는 것이 불면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혼자 좁아 터진 방에 겨우 우겨넣은 작은 침대를 혼자 쓸 수 있어서 지민 몰래 신나서 속으로 춤을 추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전에 없던 일도 아닌데 정국이 요 근래 깊게 잠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지민이 집을 나간 이유가 사실은 다툼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이 들으면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뜨릴 만한 일이었다. 지민과는 둘도 없이 친하고 정국을 포함해 셋이서 나돌아 다닌 일도 수도 없는 사이인 태형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서로 다른 과였던 지민과 정국은 사귄 이후로 교양은 대부분 같이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시간표를 짜는 편이었다. 그러나 학년이 학년인지라 외면해둔 강의들을 미룰 수 없는 때가 다가왔고 결국 그 지겹도록 똑같던 일과도 갈라졌다. 시간표가 띄워진 화면 두개를 나란히 두고 입을 비죽이는 지민을 보며 태형은 이죽이기도 했다. 눈물겹다, 눈물겨워.
 이 말 이후에는 정말로 좀 눈물겹긴 했다. 날로 지민의 상태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안면하나 없는 사람이 봐도 우울해보였기 때문이다. 이따금 정국이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 때마다 지민은 정국의 허리를 감고 꾸벅거리며 졸 뿐이었다.

 이러던 찰나에 일이 터진건, 예전부터 정국이 보고싶던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었다. 어쩌다보니 시간이 맞는건 태형뿐이었다. 정국은 티켓을 예매하면서도 지민을 떠올렸지만 내색은 안했지만 피곤에 절어있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나중에 형이랑 한번 더 보면 되는거니까. 연석을 예매하고 태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예매 다 했는데요. 보낸지 몇분 되지 않아 답장이 날아왔다. 후문 앞에서 봐. 메세지를 확인하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예상보다 영화관에 빠르게 도착해서, 둘은 극장 내에 마련되어있는 팝업스토어를 구경했다. 캐릭터 물품을 잔뜩 모아 파는 곳에는 사람이 드글거렸다. 정국은 뭔가 무기력하게 놓여져있는 인형을 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태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인형을 끌어안은 태형이 웃고있었다. 정국아, 이리와봐. 걸어가니 휴대폰을 꺼내든다.

"뭐해요?"
"염장 지르려고"
"누구한테요?"
"누구긴 누구야"

 웃어, 빨리. 곧게 뻗은 팔의 끝엔 카메라가 있었고 태형의 손바닥 반만한 액정엔 둘의 얼굴이 나타났다. 찰칵. 마음에 안드는지 이후로 두어번 더 셔터음이 났다. 신난듯 태형이 웃으며 열심히 메세지를 작성했다. 지금껏 본 그 어떤 속도보다 빠르게, 손끝을 움직이다가, 엇ㅡ 하며 멈추었다. 영화 시간 다됐다. 그 말에 정국이 멍하니 있다 발을 떼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조금은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또 그 어떤 들뜸도 없이,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왔더라 하고 다시 생각해볼만큼 머릿 속이 비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기대한만큼 괜찮았다. 출구를 향하는 화살표를 따라 건물의 복도를 걸으며 밥 먹을래? 하고 묻는 태형에 정국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집에 일찍 갈래요. 태형은 그러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밖에서 헤어진 다음부터 정국의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마음속에서 뭔가 쎄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ㅡ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촉이었다.ㅡ 결국 자취방의 계단을 두어개씩 성큼성큼 올라가 현관 문을 열었을 땐 불이 켜져있었다. 지민이 온 것이다. 집안을 둘러보다 지민을 발견한 정국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왔어요? 그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가 돌아간다. 피곤한지 좀 빨개보이는 눈을 방금 자신을 쳐다보던 속도만큼 느리게 깜빡이며, 지민이 답했다. 오늘 좋았냐?

"네?"
"태형이랑 놀아서 좋았냐고"
"..."
"좋았겠지, 사진 보니까 아주 신났더만"

 누구긴 누구야, 의 주인공은 지민이었다.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진짜 보내다니. 정국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그 형 진짜 왜그래. 뭐라 대답을 해야할까 고민을 잠깐 하다가 그냥 그 순간에 들었던 마음 그대로 대답했다. 별로 안신났어요. 진짜였다.

"걘 신났던데"
"그 형은 원래 모든게 신나잖아요"

 정국의 대답에 지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너는 별로 안 좋았다고? 되묻는 말에 정국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는건 이해하지만 슬슬 말투가 선을 넘고있었다. 투정에서 빈정거림이 짙게 묻어났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하면 안되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요즘 좀 같이 못있었다고... 혹시 그렇고 그런건 아니지? 말도 안되는 소리에 결국 입을 다물고 있던 정국도 폭발해버렸다. 그게 할 소리에요?

"아니면 아닌거지 뭘 그렇게 발끈을 해"
"형이 말을 짜증나게 하잖아요"

 지민이 잠깐 주춤했다. 정국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닌거지? 아닐 소리를 왜 하는데요, 진짜 애도 아니고 뱉으면 다인줄 아나봐"

 빠르게 말을 쏟아낸 후 숨을 골랐다. 확 끓어오른 감정이 주체가 안되서, 정국은 몇분 더 심호흡을 해야했다. 지내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만 듣고 있던 지민이 무언가를 결심한듯 조금 잠잠해진 얼굴로 말했다. 나 나갈거야. 그 말에 정국은 더 화가나서 큰소리를 냈다.

"나가!"
"반말해 너?"
"나가라고요"
"너, 내가 못나갈 줄 알지"

 지민은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의자에 걸린 점퍼를 집어들곤 집을 나갔다. 정국은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냐. 잡고싶은 마음도 뚝 떨어져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침대에 엎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지민의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았을 때 컴퓨터 플러그를 뽑은 것 처럼 정신도 잠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사람의 몸은 까다로워서 당장 시야 앞에서 고민을 치워버렸다고 해도 하루의 기저에 지민을 계속 의식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정국은 제가 그렇게 지민에 의존했나 생각하며 옆에 놓인 큰 곰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플라스틱 눈깔에 바깥 가로등이 비쳐 번뜩였다. 힉. 그 눈빛에 오던 잠도 달아날 것 같아 결국 지민이 쓰던 베개를 인형의 얼굴위로 덮어버렸다. 잠들면 자신도 모르게 꼭 팔과 다리를 지민의 위로 올려놓는게 떠올라 뽑아온 지민의 대체품은 소용 없었다.

 솔직히 정국은 자신의 뒤척임이 껄끄러움에 있다는걸 알고있었다. 오해할만하긴 했지만 해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퍽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꾸 생각해보면 정말로 섭섭한건 자신이었다. 꼬박 2년동안 사귀고 같이 살았으면서 의심을 한다는게 믿겨지지 않았다. 생각할 수록 열이 뻗쳐서 결국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를 얹어놨던 곰인형을 주먹으로 패야했다. 왼손에 박지민, 오른손에 짜증나 를 속으로 외치면서.

 씩씩대며 힘을 빼니 배가 울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꺼져버린 인형의 배가 느리게 올라왔다. 왜 몸은 기분도 몰라주고 눈치없이 본능에 충실한지 모르겠다. 고민하느라 깨어있는 탓에 몸도 계속 깨어있었던 탓일까, 정국은 한숨을 내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증난다고 아무것도 안먹어봤자 어차피 자신의 체력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자에 걸쳐둔 후드를 아무렇게나 뒤집어 쓰고 집을 나왔다. 평일 밤의 길거리는 조용했다. 가끔 고양이 한마리가 차 밑을 지나갔다. 눈이 쨍할만큼 환한 편의점에 들어가 뭘 집는지도 모르겠는 정신으로 계산까지 겨우 끝낸 다음 다시 가게의 문을 밀었을 때, 새삼 차가운 바람이 정국의 뺨을 스쳤다. 덕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지민의 생각도 났다. 언제까지 안들어오려고 이러지. 그러곤 걸음을 재촉했다. 한쪽 손목에 걸린 봉투는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국을 맞이한건 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까만 인영이었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해서 정국은 난간을 붙잡았다. 사람 놀라게 왜 저러고 있는거야.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둥글게 뭉쳐있던 몸이 움직였다. 퍼뜩 고개를 들어 정국의 얼굴을 확인한 지민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성격상 지금 아무말도 안할 걸 알기에, 정국이 먼저 말을 걸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들어가고싶어서…"

 지민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부끄럽긴 한지 고개도 못들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린다.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정국이 지민의 옆으로 다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툭툭 건드리는 것에 지민이 슬쩍 정국의 손 끝을 본다. 반응한 지민을 확인한 정국이 잡아 당기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현관문 앞에 섰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정국이 번호키를 눌렀다. 그런 정국의 뒷모습을 보던 지민이 멋쩍은듯 부스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형이 알아서 들어올 줄 알았어요"
"도어락 바꾼 줄 알았어"
"저 바꾸는 법 모르는데요?"

 지민이 저린 다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은 불이 꺼진 도어락을 다시 눌렀다. 열린 문 틈으로 훈훈한 공기가 지민의 얼굴에 훅 느껴졌다. 지민이 들어오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정국이 손에 쥐고 있던 주전부리를 내려놓으며 뒤도 돌아보지않고 지민에게 물었다. 형 근데 도어락 비밀번호 어떻게 바꾸는거에요? 며칠 째 입고 있던 외투를 벗던 지민이 멈칫 동작을 멈췄다. 그건 왜? 그냥요.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정  (0) 2017.03.16
지정  (0) 2017.03.12
지정  (0) 2017.02.07
지정  (0) 2017.01.11
지정  (0) 2017.01.02
지정  (0) 2016.12.12
댓글
댓글쓰기 폼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4,599
Today
0
Yesterday
0
링크
TAG
more
«   2020/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