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캐스퍼는 뛰었다. 뛰고 또 뛰어서 모퉁이를 돌아 커다란 쓰레기 수거함 옆에 몸을 숨겼다. 달리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으려 세게 움켜쥔 지폐가 온통 구겨져 찢어질 듯 헤졌다. 오늘은 일진이 좋은 날은 아니었다. 얌전히 구멍 내주고 돈 받고, 약을 예약받은 뒤 조용히 사라지려했을 뿐인데 이 덩어리새끼가 욕심을 부렸다. 옷을 걸치려는 캐스퍼의 허리를 끌어안고 역겹게 상처난 날개뼈에 입술을 묻기에 그대로 몸을 돌려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워낙에 얇은 허리였던지라 물살이 덕지덕지 붙은 덩치의 팔뚝은 그를 꽉 안지 못했고 덕분에 빠져나오기 수월했다. 다만 품에서는 쉽게 탈출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맞은 것에 열이 받았는지 원래 줘야하는 돈도 주지 않으려 하기에 캐스퍼는 협탁위에 아까까지 주려던 돈을 들고 도망쳤다..
제니, 너 요즘 손이 통 느리다고. 마마가 일 그렇게 하면 너 잘라버린대. 데이지가 지민의 근처에서 풍선껌을 불며 말했다. 나만큼 이런 일 닥치고 하는사람이 누가있다고 그래? 지민이 덜그럭거리는 유리잔들을 닦아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대답했다. 데이지는 타이트한 유니폼의 단추를 하나 더 풀면서, 아니 그냥 그러더라구. 근데, 너처럼 나같은 아름다운 여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없거든. 제이미 너 진짜 게이 아냐? 처음 말을 건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데이지의 수다에 지민은 잠깐 행동을 멈추고, 아니 그냥 사람에 관심이 없는거야. 그렇게 대답하려다 관뒀다. 지민은 마지막 접시를 식기세척기에 넣고, 젖은 손을 마른 수건으로 닦은 후 데이지의 단추를 잠궈주면서 말했다. 이러면 더 안예쁜거 몰라? 그리..
정국이 지민의 집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것 중 지민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목욕용품이 가득한 바스켓이었다. 다양한 향의 바디워시와 로션 그리고 여성용인듯한 화려한 디자인의 바디미스트 등이 그 안을 채웠다. 그 땐 단순히 씻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항상 정국을 만나면 좋은 향이 났던 것을 떠올리며 바스켓의 워시들에서 향을 상상하고 장면을 생각한다. 지민에게 그것들은 그정도의 의미였다. 그러나 지민이 정국과 크게 다투는 일이 있었을 때, 심지어 나중에 그것이 지민의 오해에서 시작되었던 날에 정국은 지민과 크게 말다툼을 하다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집에 작게 욕을 하고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거..
조금 유난이라고 느낄 때는 수도 없이 많다. 지나가면서 보는 물건이나 피부에 닿아오는 바람 온도 모든 것들을 연결지으며 속으로 얼굴을 그리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좋아하는 마음이 주체가 안되네, 가방끈을 괜히 다시 조절하고 지하철에 올라타 문에 얼굴이 비칠 때 까지 지민은 내내 정국의 생각을 했다. 새카만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창에 비친 웃는 얼굴이 못생겨 민망함을 느꼈을 때 그때서야 겨우 생각하기를 멈췄다. 듣고있는 수업은 매일이 같았다. 평소처럼 출력한 수업자료에 몇마디 설명을 메모하고 스크린에 띄워진 자료들을 보며 착실히 수업을 듣던 중 갑자기 교수의 말 한마디가 귀로 날아와 박힌다. 시간 지나면 모두 촌스러워 지금은 재밌고 세련되어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또 유치해보인다고… 그냥 흔하게..
지민은 바에 앉아 글라스의 테두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여자는 지민의 행동이 거슬리는듯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머리아파요, 그만해요. 그러자 지민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 너무 지루해서요. 그 말에 여자가 지민을 향해 몸을 틀고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여자는 미인이었으므로 슬쩍 미소지으며 말을 걸면 이 귀여운 동양인 남자가 분명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보는 얼굴이네요" "처음 왔으니까요" "혼자 온거에요?" "성격이 안좋아서요" 지민에게 여자의 호감을 사는건 어렵지 않았다. 워낙 지민과 웃고 말 몇마디를 나누면 누구든지 더 대화를 하고싶어 안달이었기에, 애인을 수십명씩 갈아치우는 사람도 예외..
가기 전 까지 몇번이고 당부를 했더랬다. 형은 너 평소에도 잘 하는거 알지만 그래도 귀찮다고 막 쇼파에서 자지 말고, 밥은 시켜먹을거면 꼭 밥으로 먹고. 나가기 바로 전 까지 현관 문 앞에서 캐리어를 손에 쥔 채로 잔소리를 하기에 대충 알았어요, 걱정도 많네. 하며 시원하게 대답은 했지만 사뭇 걱정된다는 얼굴로 지민이 나간 다음 정국은 바로 쇼파에 드러누워 지민 생각을 했다. 걱정은 정국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의미가 좀 다르지만 어쨌든 상대를 생각한다는 점에 있어선 같다. 정국도 나름대로 지민이 걱정되었다. 남이 듣는다면 우스울지 모르겠으나 출장 가서도 내내 저런 생각만 하면 어떡하지, 라는 오버스럽지만 충분히 가능한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뜬 생각을 하다 배가 우는 소리를 내기에 일단..
정국이 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비틀었다.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조용히 자르던 지민이 눈을 들어 그런 정국을 바라보았다. 불편하니? 그 말에 못마땅한 얼굴로 옷 매무새를 만지던 정국이 얼굴을 들고 지민과 눈을 마주쳤다. 아뇨 그건 아니고. 다시 나이프를 집어드는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제 접시의 고기를 자르며 지민이 몰래 미소 지었다. "불편한게 아니면 왜 음식이 줄지를 않아, 요즘 마른 것 같아서 데려왔는데" "먹고 있어요" 재빠르게 대답이 쫓아오고 그릇 위로 포크와 나이프가 머리위의 조명을 쪼개며 테이블 위로 어질러졌다. 하지만 자르는 보람도 없이 단 한조각의 스테이크도 정국의 입으로는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쥐고있던 것을 내려놓은 정국이 빈 입을 열었다. 오늘 저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